한국 문학 번역가 안톤 허의 에세이다. 이 책을 통해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 굉장히 많았다. 한국 문학 전문 번역가가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물고, 그들이 번역 작업 외 얼마나 많은 역할을 수행하고, 출판계에서 번역가의 지위가 그렇게 낮고, 번역가에게 어떠한 질문이 실례인지, 부커상을 비롯한 국제 문학상에서 번역가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등.
우선 나부터도 번역가를 '대체 가능한 소모품' 정도로 생각하고 무관심하지 않았는가 반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잘 한 번역은 당연한 거고, 못 한 번역은 나를 화나게 했다. 그러나 이 책을 읽고서 내 블로그 제목에도 번역가의 이름을 기재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저자가 영어권에 소개했다는 소설 <저주토끼>도 읽어보았다.
책에 실린 저자의 모든 생각에 동의하지는 않지만(대학원 이야기, 신경숙 작가 이야기 등), 다음 책이 나온다면 또 읽고 싶은 글이었다. 저자는 바이링구어라는 점을 살려서 돈을 더 벌려고 했으면 얼마든지 더 벌 텐데, 문학에 대한 사랑과 열정으로 일하고 있는 분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돌고 돌아 결국 문학을 전공한 것만 봐도. 애정이 없이는 지속될 수가 없는 일이다. 문학 번역가에 대한 냉대와 환멸하는 온갖 일들에도 불구하고 안톤 허 번역가는 멈추지 않을 것 같아 응원하고 싶다.
이 책에서도 언급되는 작가 욘 포세의 <아침 그리고 저녁>을 읽었는데 그는 노르웨이 작가고 작품은 신노르웨이어로 쓰였는데 번역은 독일어판을 기준으로 한국어로 옮겼다고 한다. 자세한 속사정은 알지 못하지만 원문을 보고 한 번역과, 한 번 번역이 된 다른 언어를 다시 번역하는 것은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지 않을까?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과 관련해 데보라 스미스 번역가의 역할은 그래도 꽤 조명이 된 것 같다. 더 많은 한국 문학이 해외에 소개되고 다양한 국가의 문학이 한국에 소개되면 좋겠다. 문학 번역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문학 번역가도 언젠가는 AI가 대체하게 될까...?
돈은 많이 벌지 못해도 좋으니 소박하게라도 먹고살 수만 있다면 문학에 한평생 바치는 것. 그것이 나의 변함없는 꿈이었다. 문제는 부모님이었다. 문학으로 먹고사는 삶은 상상도 못 하시는 분들이라 문학의 '문'자만 꺼내도 말을 끊으셨다. 문학을 전공하고 싶다고 말하는 도중에 아예 식당에서 나가버린 적도 있다. 세월이 많이 흐른 지금까지도 당시 부모님의 고시에 대한 집착이 '정상' 범주를 많이 벗어났었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법대 재학 중 수의대 편입 시험을 보겠다고 했다가 호적에서 파버리겠다는 말을 들을 정도였다. 그래서 경제적 여건이 되는 순간 집을 떠났고 아주 오랫동안 부모님을 멀리했다.
"자녀분들은 영어보다는 좋은 식단이 중요할 나이 아닌가요?" 이때 강사분이 한 말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음식도 중요하지만 친구들 앞에서 창피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했다. 영어라도 잘해야 아빠가 운전 학원 강사라는 사실을 덜 창피해할 것이라고. 그 말이 너무 충격적이어서 나는 수그러들고 말았다. (아빠가 운전 학원 강사인 게 왜 창피할 일인지, 내가 무언가를 잘하면 아빠의 직업이 왜 창피해지지 않는지, 그게 왜 하필 영어인지.. 말문이 막히게 하는 생각인데 당사자에게 뭐라 말 할 수 있을까.)
누가 뭐라 한들,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스스로 확고하면 그만이다. 남들에게서 주어지는 정체성 따위엔 신경 쓰지 않는 것이 나를 위해, 번역을 위해 영문학에서 배워야 하는 무엇이 아닌가 생각한다. 누가 불러주어야 꽃이 되는 것이 아니라, 아무도 불러주지 않아도 꽃필 수 있는 자세와 마음가짐.
한두 편 기사를 제외하면 한국 언론은 부커상 후보에 한국 책 두 권이 올랐다는 사실에 무게를 두었다. 번역가 한 사람이, 그것도 유색인종 번역가의 작품 두 권이 후보에 올랐다는 사실에는 무관심한 편이었다. 한 해 동안 부커상 후보작을 두 편이나 배출한 것은 한국문학이 대단해서라는 결론이 한국 언론의 전반적 반응이었다. 즉 작가, 장르, 문체가 완전히 다른 두 작가가 함께 부커상 후보에 오른 건 한국문학의 힘 덕분이라는 얘기였다. 그들에겐 두 작품의 번역가가 같다는 사실은 우연일 뿐이었고, 번역가는 얼마든 교체할 수 있는 사람이며, 누가 번역했어도 결과가 같았다고 보는 듯했다. 한국 사회의 번역가에 대한 전반적 무관심 내지 혐오(?)가 국수주의와 결합된 경우였다.
오늘날에도 번역가들은 표지에 번역가의 이름이 표시될 권리, 번역에 합당한 비용과 선인세를 청구할 권리, 그리고 로열티를 1퍼센트라도 청구할 권리를 위해 투쟁 중입니다. 한국에서는 번역서 표지에 반드시 번역가 이름을 기재하기 때문에 이른바 '선진국' 계열에 속하는 미국과 영국에서 2022년이 되도록 이 당연한 권리를 위해 투쟁한다는 사실을 매우 의아하게 여깁니다.
어떤 출판사도 제게 번역하라고 책을 주지 않습니다. 특정 책의 번역가가 되기 위해 저는 항상 싸워야 합니다. 작가에게 호소하고, 한국 출판사들에게 호소하고, 번역 지원 기관에 호소하고... 그런 다음 영미권 출판사들, 영미권 인플루언서들 그리고 영미권 독자들에게 호소해야 합니다. 이처럼 문학번역가의 일은 8할이 호소입니다. 이렇게 넘어야 할 산이 많은데 제가 책을 한 권이라도 출판했다는 사실이 기적일 따름입니다. 이 치열한 과정을 통과해야만 제겐 책을 번역할 기회가 생기기 때문이죠. 출판사들이 저에게 먼저 접근한 건 아주 최근의 일입니다.
저는 시골에서 올라와 백인들을 돕지 못해 안달하는 '겸손한' 아시아인이 아닙니다. 특정 권력자들은 제가 그러길 바라지만 저는 그런 포지셔닝을 거부합니다. 겸손을 거부합니다. 지구상에서 제일 겸손하지 않은 사람이 되겠습니다. 물론 제가 번역하는 작가들 모두를 사랑하고, 그 어떤 일도 기꺼이 해드립니다만 그들도, 한국 사회도 그리고 여기 계신 번역가분들 모두 번역가에 대한 혹은 자기 자신에 대한 불신을 버려야 합니다. 저는 어떤 '근본적 한국스러움'이 존재한다는 것을 믿지 않고, 그런 것이 존재한다고 믿는 국수주의자들의 말과 의견은 더더욱 신뢰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책을 사서 읽는 것도 아닌데 왜 그들의 말에 신경 써야 하나요? 또한 저는 번역가로서 구석에 처박혀 닥치고 있지만은 않을 겁니다. 이런 모습이야말로 저의 번역가로서의 '자연스러운' 모습입니다.
정말 놀라운 경험이었습니다. 문장이 줄줄이 써지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단지 조용하게, 최대한 무심하게 받아서 적기만 하면 됐습니다. 생산되는 언어를 편집하려 하거나 다른 감정을 이입하려고 할 때마다 문장들은 놀란 해저 생물처럼 무의식의 심해 속으로 쑥 빠져나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조용히, 무의식이 심해에서 다시 나올 수 있도록 머릿속을 잠잠하게 만듭니다. 물론 이 방법을 발명한 사람은 저도, 리 차일드도 아닙니다. 노르웨이 작가 욘 포세도 자신의 언어가 자신의 내부가 아니라 외계인의 교신처럼 자신의 바깥에서 오는 듯하다고 말합니다. 버지니아 울프의 <여성의 전문직>이라는 에세이도, 시애틀 서브루너리 출판사에서 출판될 예정으로 제가 지금 번역중인 이성복 시인의 <무한화서>라는 시론집도 이 방법을 묘사합니다. (무라카미 하루키도 비슷한 말을 했었던데 이게 바로 '영감'이라는 걸까.)
저는 학계와 거리가 먼 사람이고 학계에서 뭘 생각하든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하지만 한국문학 번역원이나 대산문화재단은 번역 지원을 판단하는 과정에 대학교수들을 투입하기를 좋아하므로 전문 번역가들은 하는 수 없이 이런 학술적 직역주의에 부합하는 번역을 생산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이런 고리타분한 번역을 실제 독서 시장에서는 매우 지양한다는 사실은 말할 필요도 없죠.
제 목표는 영어권 서점에서 한 번이라도 한국 소설을 집어 들 확률이 있는 독자에게 어필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분들을 위해 저는 번역을 합니다. 무슨 무슨 대학교수를 위해서 번역하는 게 아닙니다. 훌륭한 교수님들께 배운 적도 있지만 제가 그들을 위해 번역을 하진 않습니다. 이건 그들을 위한 작업이 아닙니다. 그런데 왜 제 지원금 지급 여부를 그들이 결정하나요?
출판계와 사회라는 생태계에서 번역가의 지위라는 문제가 인종차별, 신식민주의, 백인 우월주의와 얼마나 밀접히 얽혀 있는지 맛보기라도 제공해 드렸기를 바랍니다. 인종차별과 제국주의에 깊은 뿌리를 둔 역사적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특히 유색인종 번역가들이 대면한 체제적 부조리를 해소할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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