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기록

시대예보 : 호명사회ㅣ송길영ㅣ내 맘을 알아주는 것 같은 이야기

기로기 2024. 11. 22. 23:48

전작인 <시대예보: 핵개인의 시대>가 본격적으로 많은 사람 입에 오르내리기 전, 너무나 재밌게 읽었고 책에서 인용되는 이슬아 작가의 <가녀장의 시대>까지 주변에 추천을 하고 다녔는데 아니나 다를까 곧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시대예보'라는 컨셉부터 단순하면서 명료한 데다가 저자가 유튜브나 라디오에서 우리 사회 많은 이들에게 공감을 사는 (책 내용이기도 한) 현추세를 재미있게 얘기해서인지 오랫동안 베스트셀러 매대에서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머지 않아 후속작인 이 책, <시대예보 : 호명사회>가 출간되었다. 전작의 인기에 힘입어 출간 즉시 사랑받고 있는 것 같다. 


책에서 저자가 언급하는 작가가 토드 로즈, 무라타 사야카, 서은국, 우치다 타츠루 등이 있는데 모두 내가 재미있게 본 책의 작가들이라 인용되는 것이 반가웠고, 저자와 내가 독서취향이 비슷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자를 통해 알게 된 '도반'이라는 말도 무척 맘에 든다. 그러고보니 저자가 책에서 말하는 내용이 토드 로즈 3부작인 <평균의 종말>, <집단 착각>, <다크호스>에서 말하는 내용이랑 굉장히 일맥상통하는 것 같다. 그걸 한국식으로 예시를 곁들여서 잘 쓰신 것 같다. 

 

전작과 마찬가지로 이 책을 읽고 위안을 받은 점은, '내가 정말 그렇게 이상한 애는 아니구나' 라는 것. 왜냐면 책에서 말하는 내용이 꽤나 내 얘기 같았는데 커리어 관련해서 주변의 주류는 여전히 전통적인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기 때문에. 이 책의 내용을 거칠게 한줄요약 하자면 내가 친구들과 만나서 맨날 얘기하는, '뭐가 됐든 결국 내 꺼(나의 업) 해야 된다' 라고 하고 싶다. 스펙이 아니라 숙련! 나다움. 주체성. 독립성. 역시 자기자신과 대화를 많이 해야 한다. 



다만 과거에는 이익집단의 영향력과 권위가 강했기에 추종해야 했고, 지금은 힘이 약해졌으니 외면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보다 공동체적 권위주의에서 핵개인의 시대로 가는 거대한 흐름 속, 개인에게 일생에 걸친 더 많은 기회가 허락되고 있다는 새로운 축복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의 기여가 사회에 긍정적 영향을 주고 의미를 갖기까지 꾸준히 검증하는 방식이기도 합니다. 하루의 시험을 잘 본 이가 평생의 혜택을 독점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 새롭게 거듭난 이가 스스로 성장하며 그 날카로움이 주머니를 뚫고 나올 때까지 모두가 기다려주고 지켜보는 방식으로 변화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개인들은 뽑아주는 일, 뽑히는 일로 가지 않으려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마침내 성취의 지점에 도달하고 나서야 그것이 자기 꿈이 아니었다는 깨달음을 얻고 다시 새로운 꿈을 찾는 이들이 늘어나는 것입니다. 사람은 가진 것이 없을 때보다 자신이 갖고 있었던 것이 대단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더 슬퍼집니다. 온전히 끝까지 가보지 않고 중간에 깨닫는 이들도 있고, 끝까지 가보고 나서도 타인의 욕망을 욕망했던 자신을 자각하는 데 한참이 걸리는 이들도 있습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남들이 사는 대로 따라 살고 모두가 읽던 위인전대로 꿈꾸던 시대는 점차 저물고, 이제껏 효율성과 최적화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던 현상도 유효기간을 다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개인의 활로를 막는 것은 두 종류의 안일한 태도입니다. 하나는 모든 것이 지금처럼 흘러가리라는 믿음이나 희망에 의지해 안주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갑작스러운 행운으로 경제적 자유를 얻게 되리라는 소망에 기대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에게 냉철한 질문을 던지고 스스로의 감각과 역량을 면밀히 돌아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자기 성찰이 더욱 중요해지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나 자신이 배제된 해결책은 대부분 효과가 없습니다. 일상의 안정성이 흔들리는 시기일수록 모든 질문의 시작점은 내가 되어야 합니다.

이제는 '나 자신'을 배제한 해결책을 뒤로하고 새로운 시대로 나아갈 때입니다. 그 시대에서는 특정한 자질을 갖춘 사람들이 더 많은 기회를 얻을 수 있습니다. 먼저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명확히 아는 사람들이 주목받게 될 것입니다. 또한 다른 이들과의 대등한 관계에서 시너지를 창출할 수 있는 능력이 중요해집니다. 더불어 스스로 자립할 능력을 갖춘 사람들이 새로운 기회를 획득하는 시대가 다가올 것입니다.
이러한 변화는 자연스럽게 일어납니다. 우리가 의존과 종속에서 벗어나 자존과 자립을 추구할 때 중요한 변화가 일어납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더욱 명확하게 바라볼 수 있으며, 이를 통해 내면의 불안을 해소할 수 있는 실마리를 발견할 것입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시작점은 N잡러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본인의 잡'인 '본진'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본진'이라 함은 순전히 직무 혹은 소득을 벌기 위한 수단이라기보다 자신의 정체성이 자리매김하는 고유 영역을 뜻합니다. 본진도 없이 곡예사처럼 N개의 일을 저글링 하는 것은 정체성의 기반이 없음을 고백하는 것과 같습니다. 공공 사업에 참여하고, 개인적으로 글도 쓰고, 사람들과 연계해서 모임도 갖는 등 여러 가지를 해도 그중 어떤 것도 자립할 수 있는 업이 되지 못한다면, 마치 작은 부품을 모아 커다란 합체 로봇을 만들어도 끝내 젖은 볏단처럼 서지 못하는 것 과 같습니다. 가장 중심에 있어야 할 코어가 불안정하고 본인이 가지고 있는 정체성이 흔들리기 때문입니다. 결국 누구에게 물어보더라도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설명할 수 없 는 불안한 구조가 나오게 됩니다.
이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자신의 삶을 정의할 수 있는 수식어'를 만들어보아야 합니다. 그 단어가 본업으로 인지될 수 있다면 정체성의 뿌리가 단단히 자리 잡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실천 방법과 효용의 대상이 모두 존재해야 합니다.

우리가 일하며 보내는 시간은 노동으로 경제적 이익을 얻는 데만 머무르지 않습니다. 어떤 이들은 사는 게 뭐 별 거냐 라는 자조적 표현으로 일상의 마모를 대수롭지 않게 바라보지만, 이때 가장 결여된 부분은 '삶의 의미'입니다. 각자의 일터에서 매일 8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자동 사냥 모드'로 출근해 퇴근까지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면 매일 그만큼의 시간이 내 인생에서 지워지는 것 같다는 공포가 다가옵니다. 이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선발'이라는 단계가 아닌 '선언'이라는 행위를 이해하는 일입니다.

그는 우편으로 서로에게 선물하고 싶은 책을 교환해서 책에 대한 안목과 취향을 확인하고 싶었다고 고백합니다. 나이나 학력, 사는 곳이나 직업은 상대를 알기 위한 정보가 되지 못함을 알고 있었던 그는 "한 사람의 독서 목록이야말로 그 사람에 대해 가장 많은 정보를 담고 있다"라고 믿습니다. 이처럼 책 안에는 바로 그 사람이 들어 있기에 함께 읽으며 서로를 배워 갑니다. 이러한 관점의 출발점은 함께 읽는 책의 저자가 고민했던 질문에서 비롯됩니다. 깊은 사고를 한 이가 자신의 고민 을 언어로 정제하여 보낸 메시지에 공감한 이들이 함께 모여 저자에게 화답하며 다시 생각을 더욱 발전시킬 때 도반의 주파수는 조화를 이룹니다. 그 어우러짐은 주어진 환경에서 우연히 엮인 네트워크에 자신을 한정하지 않으려는 욕망을 대변합니다. 핵개인이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했듯 자신을 둘러싼 네트워크 역시 주체적으로 선택하고자 합니다. 그 기점을 생각의 정수가 집약된 '책'에서 찾는 것입니다.

반드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시장이 존재한다고 해도 그 배움의 과정이 어려워 쉽게 마칠 수 없어야만 참여자가 누릴 이익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만약 배움의 과정이 수월해 끝까지 이수하는 것이 순조롭다면 그 분야는 돈이 되기 어렵습니다. 모든 것이 원활한 일에는 새로이 100만 명이 참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쉽기만 한 일로 부가가치를 낼 수 없는 사회에 우리가 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당신의 직업이 어렵기 때문에 당신이 돈을 버는 것입니다. (메르님도 늘 말씀하시는 흔싸귀비..)

이제 핵가족을 넘어 핵개인의 시대가 오며 그 작은 가족에서 오는 관계성마저 빠르게 와해되기 시작했습니다. 베이비부머 시대로만 거슬러 올라가도 '사촌은 형제와 같았다'라고 추억합니다. 지금은 사촌은커녕 형제도 귀한 사회가 되며 가족의 범주는 빠르게 협소해지고 있습니다. 출생의 급감뿐 아니라 '생애 비혼'을 선택하는 이들이 늘어나며 부모의 사망 이후에 혼자 지내야 하는 사람들의 수 역시 급격히 늘어납니다. 이렇게 생애에 걸친 관계에서의 선택이 변화하고 각자는 자신의 정체성과 귀속감의 대상을 찾기 위한 대안을 빠르게 모색하고 있습니다. 이 탐색에서 주목할 만한 특성은 두 가지로 관찰됩니다. 첫 번째는 새로운 세대의 정체성은 출생 당시의 가족처럼 주어진 환경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기에 그의 가치관과 자신이 정한 기준에 맞는지 깊게 고민한다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태어난 환경'이 본인의 선택이 아님에도 운명처럼 따라야 하는 것이라 믿었기에 그 결속을 와해시키는 것은 '천륜을 저버리는' 일이라 불리기도 했습니다. 때문에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가족의 의무를 다하려 노력했던 것입니다. 이제 새롭게 찾는 정체성은 주어진 것이 아니라 '선택하는 것'이라 믿는 경향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하나의 모둠에 자신의 정체성을 모두 담지 않으려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관찰되는 가장 중요한 변화는 한 개인이 생각하는 그의 정체성이 단일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시어머니가 "2세 계획은 부부가 결정해야 할 문제"라고 부연 설명하는 모습에서 지난 시절 누군가를 위해 삶을 살아야만 했다고 여겼던 우리의 옛 사고방식을 다시 한번 돌아보게 됩니다. '편찮으신 부모님이 눈을 감기 전에 결혼식을 올린다'라거나 '대를 잇기 위해 결혼을 한다'라는 표현이 난무하던 지난 시절의 관습이 다시 떠오르는 것입니다. 아이를 낳든 뭘 하든 각자의 선택임을 알려주는 독일에서 온 시부모의 생각은 연배가 있는 한국인들에게는 흥미롭게 다가올 것입니다. 결혼의 경우 법률적 제도를 떠나서 사회적 관습으로 수 많은 하객과 증인을 모신 상태에서 한 선언이 깨기 어려운 약속이기에 더욱 꺼려진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결혼이라는 세레모니가 성대한 이유는 이전의 상태로 돌아갈 수 없다는 비가역적인 압력을 행사하는 것으로, 여기에 묶이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논의에 대해 "요즘 젊은 친구들은 그렇게 생각하지도 않는다"라며 "왜 다른 사람들 앞에서 약속했다고 해서 결혼을 깰 수 없나요"라는 질문을 하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