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기록

인구 감소 사회는 위험하다는 착각ㅣ우치다 타츠루 외ㅣ김영주 역ㅣ인구 감소를 보는 일본 학자들의 시각

기로기 2024. 11. 10. 21:05

인구 감소 관련된 책도 종종 보고 있는데, 이 책은 우치다 다츠루라는 사상가에게 관심이 생겨 그의 저작들을 둘러보다가 발견한 책이다. 2018년에 쓴 책이라 벌써 6년 전인데, 그때 봤으면 더 좋았겠다. 이래서 지금도 출간되지만 묻히고 있는 책들을 열심히 찾아 읽어야 한다. 2024년의 나는 책을 열심히 읽었지만 그럼에도 나중에 분명 '2024년에 이런 책이 나왔었어?' 하는 책들을 많이 만나게 될 것이다.
 
제목을 보고 인구 감소 사회가 어째서 위험하지 않을 수 있는지에 대한 답을 얻고 싶었지만, 제목의 답을 얻지는 못했다.
책의 컨셉은 우치다 타츠루를 비롯한 10명의 학자/작가가 각자가 생각하는 인구 감소 사회에 대한 의견을 담은 것인데 각자 생각하는 포인트가 달랐다. 정말 거칠고 간단하게 내가 이해한 바를 정리하면,
 
서문( 우치다 타츠루 )
1번( 이케다 기요히코 ) : 자급자족+기본소득? 자본주의의 큰 변화?
2번( 이노우에 도모히로 ) : 두뇌자본주의(지력)
3번( 모타니 고스케 ) : 애 낳고 싶은 젊은이들을 지방으로 많이 보내자
4번( 히라카와 가쓰미 ) : 인구감소는 문제가 아니라 경제발전과 근대화의 귀결로 이해해야 한다, 혼외출산도 차별하지 않는 제도, 상호부조
5번( 브레디 미카코 ) : 축소사회를 올려치기 하지 말자
6번( 구마 겐고 ) : 무사(사무라이)와 건축업을 연결지어서 상업을 받아들이자고 주장
7번( 히라타 오리자 ) : 청년층이 육아친화적 지방도시로 가서 아이를 낳게 하자 (지방도시의 극도로 보수적인 시각도 비판)
8번( 다카하시 히로유키 ) : 소비자주의에서 벗어나 먹거리에 대한 책임감 가지라, 인간은 자연과 생로병사를 통제할 수 없다 (피터 틸의 생각과 정반대), 도시와 지방의 관계맺기
9번( 오다지마 다카시 ) : 해답은 없고 국가가 이래라 저래라 하지 맙시다
10번( 강상중 ) : 평화주의, 저성장 받아들이기
 
 
일본 사회에서는 최악의 사태를 상정하여 그 대처법을 고안하는 태도 자체를 '비관적 행동'으로 분류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엄명이 내려집니다. 비관주의에 빠지면 인간은 '쇠퇴숙명론'에 사로 잡혀 대응을 취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결국 사회가 전복되기 때문입니다. 저는 절망적 사태에 대비하는 인간을 비관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적어도 〈에어포트 77>의 경우는 그렇습니다). 그러나 일본 사회에서 저처럼 생각하는 인간은 소수의 예외처럼 보입니다. 왜냐하면 분명 그들의 주장대로 일본인이 '최악의 사태'를 상정할 경우, 어떻게 대처할지 냉철하게 검토하기 전에 절망한 나머지 사고정지 상태에 빠져버리기 때문입니다.
인구 감소는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면 망국의 위기를 초래할 수 있는 문제입니다. 그러나 정부도 자치단체도 아직 그 어떤 대책도 강구하지 않고 있습니다. 

한마디 덧붙이면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모든 현생 인류는(아프리카를 떠나지 않은 사람들을 제외하면) 수만 년 전에 최대 1만 명 정 도였던 사람들의 자손이다. DNA의 99.9퍼센트가 동일해 거의 클론에 가깝다. 일본인이라는 생물학적 인종은 존재하지 않는다. 일본열도에 살고 일본어를 하면 인종에 관계없이 모두 일본인이다. 지금 일본열도에 살고 있는 사람들도 다양한 인종 사이에서 이루어진 혼혈의 결과물이다.


던바의 수만 넘지 않으면 된다
일본에서 인구가 감소한 이유는 여성이 육아의 노예가 되기를 거부하고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세계자본주의와 그 앞잡이 정치권력이 아무리 육아는 훌륭하다는 환상을 강요해도 금전적• 시간적 여유가 없는 대부분의 여성은 간단히 속지 않았다. 생물학적 관점에서 보면 자원의 양이 동일한 경우 인구가 적을수록 1인당 이용가능한 자원의 양이 증가한다. 솔직히 저출생은 개인의 행복에 확실하게 공헌할 것이다.

자식을 무상으로 양육하는 것은 의무다. 현대인은 이러한 무상증여의 윤리를 등가교환의 윤리와 구분해서 사용하고 있다. 부모자식과 형제라는 혈연가족이나 강한 동료의식으로 이루어진 공동체의 내부에서는 무상증여의 윤리가 일반적이고, 외부와의 교환에는 등가교환의 윤리를 사용한다. 실은 우리는 우리가 어 째서 윤리를 구분해서 사용하고 있는지 이유를 잘 모르고 있다.
밸런타인데이에 젊은 남자는 500엔 정도의 초콜릿을 선물 받는다. 그러나 그 답례는 아마 자릿수가 하나 더 많은 다른 무엇일 것이다. 적어도 남녀 모두 이때는 등가교환의 개념을 적용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  일본에서는 병문안 선물에 대한 답례는 받은 금품의 반액에 해당하는 물건으로 보낸다. 신사와 절에 바치는 새전은 증여와 비슷하다. 등가물의 보상은 원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보다는 훨씬 소중한 가족의 안녕이나 사업성공을 기대한다.
현대 사회에서는 여전히 등가교환과는 다른 종류의 교환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현대인은 이러한 습관을 버릴 생각이 없다. 이렇게 좀더 많이 돌려주거나 좀더 적게 돌려주는 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있는 그대로 말하면 그것은 '관계'다. 빛을 진 상태는 청산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이기에 청산될 때까지는 빌려준 사람과 빌린 사람은 관계가 유지된다는 의미다. 거꾸로 말하면 청산이 끝났다는 것은 관계가 끝났다는 것이다. 끊임없는 관계의 청산이야 말로 자본주의의 원동력이다. 

2018년 초에도 연예인 쓰지 노조미가 아이를 보육원에 보내고 헬스장에 간 일로 인터넷에서 비판을 받은 사건도 있었다.
언제부터 일본은 이렇게까지 야박한 나라가 되어버린 것일까?
아이를 보낼 보육원을 찾는 활동, 이른바 '보활'을 하고 있는 어머니들은 너무나 심각한 현실에 '아이를 낳은 것 자체가 잘못이었던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마저 든다고 한다. 아이를 기르고 있는 어머니도 고립되기 쉬운 존재다.

몇 가지 의문점이 생긴다. 먼저 그 사람들은 과연 도쿄에서 자신에게 맞는 일을 하고 있을까? 그러나 문제의 핵심은 그것 이 아니다. 도쿄에는 자신에게 맞는 일을 발견할 수 있는 가능성이 펼쳐져 있다. 가능성이 환상에 지나지 않아도 역시 도쿄에는 아직 꿈이 존재한다. 반대로 지방에는 희망이 없다. 물론 도쿄에서만 할 수 있는 일도 있다. 그런 경우는 어쩔 수 없다. 그리고 정말 그런 일을 하고 싶은 사람, 하고 있는 사람은 도쿄에서 살아도 상관없다. 그러나 막연하게 가능성에 매달려 있는 것 뿐이라면, U턴이나 1턴을 선택지에 넣어도 되지 않을까?
도요오카시에서는 "도시개발과 자기결정능력은 수레의 양쪽바퀴"라고 말한다. 실제로 도요오카에는 작은 전문대학 하나밖에 없기 때문에 인구의 일정수가 한 번은 외부로 나갈 수밖에 없다. 이유가 있어서 파리나 뉴욕에 가는 것은 상관없다. 그러나 "동경심만으로 도쿄에 보내지는 않겠다"는 것이 도요오카시의 교육 방침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18세까지 자신이 나가고자 하는 길을 선택하 거나, 길이 결정되지 않아도 그 시점에서 최선의 선택을 본인이 판단할 수 있는 힘이 필요하다. 그만한 교양을 익히기 위해서 18세 까지 세계 일류의 예술을 접하게 한다는 것이 도요오카시 문화정책의 기본이다.

태평양전쟁이 끝나고 일본인은 농촌을 떠났다. 뜻대로 되지 않는 자연과 타인, 지역사회 등의 번거로운 관계를 버리고 도 시로 흘러들었다. 그러나 번거로움에서 해방되는 대신, 자연이나 지역사회와의 관계 속에서만 얻을 수 있는 지혜•기술•판단력을 포기했다. 생활의 풍요로움을 원자력발전과 유전자공학 등의 거대과학big- science에 맡기고, 행정•과학기술•경제에 모든 것을 일임한 채, 관객석 위에서 강 건너 불구경을 하기로 했다.
그런 삶에는 공동체의 생활을 자신의 지혜와 창의적 노력으로 만들어가는 기쁨과 감동이 존재하지 않는다. 모두 함께 지혜를 모아 지역의 과제를 해결하는 마음가짐을 잃고, 사회를 만들어가는 당사자가 아니라 '손님'이 되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