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기록

어떤 동사의 멸종ㅣ한승태ㅣ아마도 사라질 직업을 직접 겪고 얘기하다

기로기 2024. 11. 14. 22:59

친구의 추천으로 읽었다. 책 설명을 들을 때는 굉장히 테크적인 (AI 시대가 오면 이러이러한 이유로 이러이러한 직업이 사라질 것이고, 왜냐하면 식의) 책일 거라 생각했는데, 정반대로 저자가 직접 몇몇 직업(콜센터, 상하차, 뷔페 요리, 건물 미화)을 체험하며 겪은 일화를 일기장처럼 상세하게 작성하여 온갖 인간군상이 다 나오는 책이었다. 내 세상이 얼마나 좁은지, 내가 어울리는 친구들이 얼마나 나와 비슷한지, 세상에 나와 다른 라이프스타일과 상식을 가진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새삼 느꼈다.
 
결혼을 화장실 가는 것에 비교한 게 있었는데 절묘하다고 생각했다. 베트남 속담이랬나? 가기 전엔 가고 싶어 안달이고, 막상 가면 나오고 싶어 안달이라는. 
 
저자에 따르면 제일 힘든 것은 역시 콜센터였다고 한다. 놀랄 일은 아니다. 다시 한번 고객센터 통화 시 그 분들에게는 아무 죄가 없음을 명심해야겠다고 다짐한다.
 
뷔페는 남은 음식을 다 버린다고 한다. 환경에도 안 좋을 뿐더러, 업장마다 케바케겠지만 사용하는 재료도 전반적인 위생도 ... 얘길 들으니 못 가겠다. 그냥 내가 주문한 메뉴를 느려도 정성스레 요리해주는 그런 곳에서 먹고 싶다. 
 
미화하는 아저씨들이 결혼식 끝나고 남은 빵이나 남은 와인을 모아서 가져간다는 얘기도 놀라웠다. 더 놀라웠던 건, 미화부 내에서 불륜이 일상적이라는 것. 이것도 미화하는 곳마다 다르겠지만 저자가 겪은 곳은 그랬다고...
 
만나는 모든 사람, 노동자들께 예의를 갖추어야겠다. 동료 시민들의 노고에 감사해야겠다. 이 너머에 사람이 있다는 것을 항상 염두해야겠다. AI의 발달에 따라 저자가 겪은 직업이 정말 다 사라질지 아닐지 알 수 없지만, 우리 사회가 충분히 대비되어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식당 이야기 : "보면은 직장에서 젊은 사람들 힘센 남자들, 이런 사람들만 뽑으려고 하잖아요? 그게 뭘 모르는 거예요. 그런 젊은 애들, 덩치 좋은 남자들은 언제든지 내키지 않으면 그만둬요. 우리 남편만 해도 누구랑 싸웠다고 누가 기분 나쁘게 했다고 그만둔 게 몇 번째예요. 그치만 결혼해서 애까지 있는 여자들은 가게가 망하기 전까진 절대 안 그만둬요. 그런 사람들은 정말 필사적이에요. 절대 중간에 일을 그만두지 않는 사람들은 애 있는 엄마들이에요. 직원들이 자꾸 들락날락해서 골치가 아픈 사람은 애 키우는 엄마들만 뽑아야 돼요." (찡해지는 대목이었다...)

식당 일을 쓰면서 음식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순 없겠다. 한가지 내가 이 식당에 감사한 게 있다면 여기서 일한 덕분에 뷔페를 두고 하는 환상을 떨쳐버릴 수 있게 된 점이다. 이곳은 비싼 재료라고 할 만한 건 하나도 사용하지 않았다. 게딱지볶음밥에는 대용량으로 파는 전복소스가 두 숟가락 들어갈 뿐이지 실제로 게는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다. 전복내장죽 역시 볶음밥에 썼던 것과 같은 전복소스가 들어갔고 전복은 조금도 들어가지 않았다. 이곳 양념 선반에서 해결사 역할을 도맡은 전복소스는 화학조미료의 바닷속에 전복 추출물이 살짝 몸을 담갔다 나오고 남은 무언가였다. 식자재 대부분은 이곳의 본사가 베이징에 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중국산 일색이었다.

아마도 인기의 원인은 이곳 특유의 손맛 덕분이 아닌가 싶다. 무슨 말이고 하니, 내가 일하는 동안 화장실에서 마주친 직원 가운데 볼일을 보고 손을 씻는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충격...)

 

택배 상하차 이야기 : 몸은 불편하고 50이 넘었는데 사업은 망했고 나 같으면 이 중 하나만으로도 정신과 약을 달고 살았을 거다. 하지만 그는 매사에 희망적이었고 자신이 넘쳤다. 만약 똑같은 상황에서 석구 형님이 편의점 알바나 콜센터 상담사였다면 상황은 많이 달랐을 거다.
"나 처음 일한 날이었는데 새벽 내내 땀 뻘뻘 흘리면서 일하다가 다 끝나고 밖에 나왔는데. 어떤 건지 알죠? 진짜 그지꼴로 간신히 서있을 힘만 남아서. 근데 나가니까 햇빛이 막 쏟아지는데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은 게, 와아아 세상이 어떻게 그렇게 달라 보이냐. 오기 전엔 나도 걱정 많이 했어요. 20대 때 노가다 좀 뛰었지만 그거야 30년 전 일이고 젊은 애들도 골골댄다는데 내가 할 수 있을까, 처음엔 좀 버벅댔지만 끝날 때쯤 되니까 할 수 있겠더라고. 나는 거뜬히 하는데 등치 막 이따만 한 노랭이들이 힘들다면서 집에 가는 거 보니까 기분도 좋고 흐흐.
그러면서 밖에 나왔는데. 노오오오란 해가 떠 있는 걸 딱 보고 있는데. 그걸 뭐라고 할까, 아 뭐라고 하면 좋을까. 나 살 수 있겠다. 충분히 살 수 있겠다. 그런 기분이 들어요. 그게 참 희한해. 밤새 술 퍼마시다가 해 뜨는 걸 볼 때는 세상에 그렇게 비참한 게 없는데. 내가 너무 별 볼 일 없고 쓰레기 같고 이렇게 또 하루 사느니 그냥 콱 뒤져 버리는 게 낫겠다 싶은데, 일 끝나고 해 뜨는 걸 보면 나도 뭔지 모르겠는데, 보고 있으면 그냥 잘 살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들더라고." (숙연하기도 하고 감동적이기도 했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