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대에 위치한 박정민 배우의 서점에 들른 적이 있었다. 본인이 쓴 에세이도 훨씬 앞서 출간한 적이 있고, 그 후로도 가끔 글을 쓰는 것 같아서 책과 글에 애정이 큰 배우라는 것은 알고 있었는데, 출판사를 시작한지는 모르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첫 책을 냈을 때는 본인의 이름을 앞세워 홍보하는 것을 지양했다고 한다. 본인의 인지도를 이용해서 치트키를 쓰는 것 같았다고. 그런데 생각해보니 본인의 이미지보다 믿고 글을 맡겨준 작가들을 생각해서라도 적극적으로 홍보해야겠다고 심경에 변화가 생겨 두 번째 책인 이 책부터는 여기저기서 많이 언급을 하는 듯 했다. 서점에 가서도 도서관에 가서도 이 책을 만났다. 마침 요즘 출판사들에도 관심이 많았고 동물권도 공부하고 싶었는데, 동물권을 중시하는 두 자매가 썼다고 해서 읽어보았다.
읽어보니 내용은 동물권에 대한 의견보다는 일상 에세이에 가까웠다. 박소영 작가가 이전에 쓴 책 <살리는 일>이 직접적으로 동물권에 대한 책이라고 해서 그 책도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책은 완전펼침제본 방식을 채택했는데, 좌우로 쫙쫙 펼쳐져서 너무나 편하고 보기에도 책을 묶은 오렌지색 실이 그대로 드러나 개성적이고 이쁘다. 이 방식을 채택하는 책이 많아지면 좋겠다.
-환경을 이유로 출산을 안 하는 사람이 있다더니 이 분들도..! (아이 안 낳는 사람들은 아이 낳은 사람들의 자녀들로부터 부양을 받는다고 이기적이라고 매도하는 선배들에게 기후위기 시대의 출산은 다른 차원에서도 재고되어야 한다고 의견을 피력한 에피소드가 인상적)
-찜통 같은 여름에도 최대한 차량에서 에어컨을 틀지 않기를 실천함
-화장도 안 하고 머리도 직접 자르지만 예전엔 외모 강박, 다이어트 중독이었다는 사실
-비건 실천
-여행도 못 갈 만큼 일상적으로 시간 들여 동물을 보호함
-음악을 들으면서 위로를 받지만 그 위로가 바뀐 거 없는 현실에 안주하고 망각하게 할까봐 걱정함
등 여러 모로 '여기까지 생각을 하는 구나' '이렇게까지 하는 구나' 싶었다. 내가 지향하는 삶이라고 말하긴 어렵지만 그 깊은 마음에 대해서 생각하는 시간이었다. 많은 사려 깊은 의견에도 불구하고 탐조에 대해서는 완전 동의되진 않았다. 동물원이랑은 다르다고 생각되었다.
힘들 때 책이나 영화나 미술로 달려간다는 거나, (윤리와 관련해서) 예술가에 대한 존중감과 실망감에 대한 얘기도 나와서 요즘 내가 고민하거나 공감할 수 있는 부분도 있었다.
나중을 위해 모으고 나중을 위해 참는 삶을 살지 않는다고 말하는데, 최근 읽은 <자유의 가격>에서는 딱 그런 삶을 살고 있기에 대조되었다. 누구의 삶이 옳다 그르다 말할 수 없고 저마다 자신에게 맞는 삶의 기조를 채택하는 구나 싶다. 타인에게 강요하지 않고 강요받지 않으면 되지 않을까.
결혼도 마찬가지다. 서른을 넘기면서부터는 결혼에 대한 생각이 머릿속에서 자취를 감추다시피 했을 정도로 나는 결혼에 무관심한 사람이 되었는데, 제도 자체에 결연히 반대한다기보다는 이해되지 않는 측면이 컸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서 결혼이란 원가족과 떨어져 다른 사람-'반대 성별'을 가진-과 새로운 가정을 만드는 것을 뜻하는데, 이런 공식을 왜 따라야 하는지 납득할 수 없었다. 원가족과 꼭 분리되어야 하나? 지금 함께 살고 있는 사람과의 궁합이 나쁘지 않다면? 집을 나가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는 것이 성숙의 지표처럼 여겨지는 이유는 무엇인지?
서로 마음이 통하고 화합할 줄 아는 것이 동거(인)의 조건이라면 수영과 나는 세상 어느 커플보다 이상적인 조합에 가깝다. 우리는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 중요하다고 혹은 중요하지 않다고 여기는 것이 대부분 일치하고, 필요한 분야에서 의미 있는 대화를 나눌 수 있으며, 상대가 가는 길을 진심을 다해 응원한다. 더욱이 서로가 원하기만 한다면 함께 사는 데 별다른 수고를 들이지 않아도 된다. (보통의 결혼 생활에서 가치관의 일치, 의미 있는 대화, 진정성 있는 응원, 함께 있어 편안함이 결여된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우리 사회는 성인이 된 자매가 한 집에 사는 것을 고운 눈으로 보지 않는다. 나이 든 자매가 함께 산다면 그건 둘 모두 패배자라는 증거이며, 패배의 요인이 유전자에 있다는 뜻이 된다. (여기까지 쓰고 보니, 우리 사회가 생물학적 여 성과 남성 간 결혼을 장려하는 것은 오로지 재생산 때문이라는 사실이 피부로 느껴진다.)
우리 자매는 세상이 규정하고 강요하는 것들을 조용히 밀어내기로 했다. 서로 마음만 맞는다면 형제나 남매, 삼촌과 조카, 회사 동료 간이라도 함께 살지 못할 까닭이 없으며, 반드시 두 사람이어야 할 이유도 없다. 당연히 인간을 낳아 길러야 한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도움이 필요 한 인간•비인간의 자매로, 때로는 보호자로 우리는 그렇게 살기를 원한다.
그런 이들과 말을 섞어봐야 소통은 가능하지도 않고 화만 날 뿐이라고. 그러니 그저 사뿐히 서로를 스치듯 지나가라고.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백번이고 천 번이고 옳은 말이다. 그러나 지키고 싶은 존재가 있는 사람은 그럴 수 없다. 간절하게 지키고 싶은 것이 있는 사람이 늘 약자다. 입을 여는 순간 괜한 시비에 말려들 것을 알면서도, 상대방을 완전히 이해시키거나 설득하지도 못할 것을 알면서도 기어이 입을 뗄 수밖에 없다. 그렇게 자발적 패배자가 되고 마는 것이다.
당시 나는 오디션장에서 극중 역할로서가 아니라 감독의 연인이 될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를 평가받는 기분으로 서 있을 때가 많았다. 실제로 그 관문을 통과한 날에는 대사 한 줄 읊지 않고도 오디션에 합격하기도 했다. 도망치듯 빠져나온 극단에서 날 붙든 작가도, 나를 주인공 배우로 점찍었다던 영화감독도 모두 중년의 유부남이었다.
감독은 촬영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자신과 연애할 의향이 있는지를 알려달라고 대놓고 물었다. 캐럴라인 냅의 말처럼 나는 '취약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성적 접근은 물리치되 지적 존중은 받아들일 수 있"는지 판단 할 수 없었다. 나는 이것도 기회인가 싶어 머뭇거렸고 휘둘렸고 그러다 곧 도망쳐 나왔다. 도망친 뒤에도 한동안 휘청였다. 옳은 결정에 후회가 일 때마다 나 자신에 대한 혐오를 감당하기 어려웠다. 그것이 정말 기회였던 것만 같아서.
수영을 배우기로 한 건 용기가 생겨서라기보다, 현실의 공포를 외면하기 위해 현실과 무관한 공포를 찾아내야 했던 것뿐이다. 나는 정말로 잠수를 탔다.
늘 절박한 마음으로 가까운 거리에서 볼 수 있는 것들을 찾아다녔다. 자투리 시간에 볼 수 있는 영화, 회사 근처 미술관에서 볼 수 있는 그림들이 말할 수 없이 소중했다. 불안과 오욕이 여기저기 들러붙으면 가라앉은 몸을 이끌고 꾸역꾸역 미술관과 극장에 찾아갔다. 비로소 나의 피난처에 도착하면 뜨거운 숨을 몰아쉬며 쌓인 것들을 배출했다.
그러니까 그곳에서, 나는 늘 울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책이 있었다. 상처 주는 말과 비난하는 눈길 사이에서 책은 내게 유일한 방패였다.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눈물이 차오르는 날이면 점심시간에 책을 싸들고 사무실을 나섰다. 한 권을 펴서 그 속에 곧바로 머리를 묻으면 그제야 안전하다는 감각이 나를 감쌌다. 그러니까 아침에 눈을 떠서 잠드는 순간까지 눈은 내게 거의 모든 것이었다. (앞이 보이지 않는다면 동물을 구조하고 동네 고양이의 밥을 챙기는 일도 거의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까지 생각하자 의문이 밀려왔다. 눈이 내게 아무리 소중한들, 특정 신체 기관에 이 정도의 중요성을 부과하는 것이 옳은가?이것은 그 자체로 시각 중심주의를 강화하는 행동이 아닐까? 내가 앞을 볼 수 없는 사람을 원 천적으로 배제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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