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기록/여성

이만하면 괜찮은 남자는 없다ㅣ박정훈ㅣ남성이 말하는 여성혐오

기로기 2024. 11. 4. 20:24

<친절하게 웃어주면 결혼까지 생각하는 남자들>이라는 책을 쓰신 박정훈 기자님의 책이다. 예전부터 읽어야지, 읽어야지 하다가 이제야 봤다. 이 분은 국내에서는 (내가 아는 한) 드문 남성 페미니스트이다. 책은 맞는 말 대잔치다. 전국민이 읽었음 좋겠다.이 책을 읽고 다른 한국 남성 페미니스트가 쓴 책도 궁금해져서 조만간 읽어볼 생각이다. 현직 교사가 쓰신 책이던데 매우 기대된다. 

 


31) 특히 중년 남성들이 '나 잡혀 살아' 혹은 '요즘은 여자들 팔자가 더 좋아'라고 이야기하면서 스스로를 '피해자화'하는 행태는, 2030 안티페미니즘의 기저에 있는 남성 약자론과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둘 다 엄살이 너무 심하다는 것이다.

착각도 고백도 하지 마시길
이성애자 남성들은 자기 자신에 대해 너무 모른다. 자신의 존재가 여성에게 위협적이거나 불쾌감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잊고 산다. 개개인이 '나쁜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지금껏 남성들이 호감이나 사랑을 빌미로 여성들에게 물리적 정신적 가해를 저질러온 역사가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여성들은 일터에서 고백을 받거나 일방적인 치근거림에 당황하거나 고통받았던 경험, 집 앞까지 스토킹을 당한 일 등을 고발하고 공유하고 있다. 그들에게 남성의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이성적 관심이나 고백이 달갑게 느껴질리 없다.
'고백해서 혼내주자'라는 말이 있다. 많은 남성에게 이 말은 농담이겠지만, 여성들에게는 실재하는 공포다.

실제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성 관계에서도 여성의 주체성을 무시해왔으니, 리얼돌과의 섹스를 사람과의 섹스와 비슷하다고 여길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더더욱 리얼돌을 단순한 인형으로 볼 수 없다. 여전히 남성들이 리얼돌 같은 여성상을 원하는 상황에서, 또 리얼돌이 완전히 남성의 성적 만족을 위해 종속된 여성을 형상화한다는 점에서 위험하다. 포르노도 남성 중심의 성적 판타지지만 그것을 통해서 남성들이 왜곡된 성관념을 배우고 현실에 그것을 적용하려 하듯, 리얼돌이 용인되는 사회에선 오로지 성적으로 대상화된 여성의 모습이 정당화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지금은 '평등한 섹스'에 대해 이야기할 때다. 섹스라는 행위를 서로의 몸을 알아가면서 교감하는, 하나의 '소통 방식'으로 재규정해나가야 한다. 더 이상 남성의 성욕과 남성의 성기가 섹스의 중심이 되어선 안 된다. '관계의 혁명'을 고민해야 할 시기에 대체 웬 리얼돌이란 말인가. 지금의 젊은 남성들이 부디 한 걸음 내디뎠으면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평등한 관계 맺기에 대한 고민이지, 남성 중심적 욕망이 형성화된 리얼돌을 지켜내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포르노 합법화는 전체적인 시장을 키우고, 다시 불법촬영물이 공공연히 공유될 수 있는 환경을 만들 가능성이 크다. 또한 일본의 경우를 비춰보면, 한국 역시 사실상 성착취 과정을 통해 여성들이 포르노 시장에 유입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보나 마나 남성의 시선에 부합하는 포르노가 양산될 텐데, 인식 개선이 어떻게 되겠는가 말이다. 무엇보다 2000년대 초반 '포르노 합법화'를 주장했던 남성들이 어떤 세상을 만들었는지 지금 보고 있지 않은가.
'남성은 야동을 보며 성욕을 푼다'고 공공연히 말하던 세상은 이제 끝내야 한다. 남성의 성욕이 세상에서 가장 절실한 욕구인 양 여겨지고, 야동에 환장하는 남성들을 흐뭇하게 바라봤던 사회가 지금까지 어떤 남성들을 만들어냈는지 확인할 수 있다.

작가 허지웅 씨는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n번방 사건이 '증오범죄'라고 말했다. 이 지적엔 두 가지 문제가 있다.
첫 번째, 기성세대 남성들을 n번방 사건의 책임에서 자유롭게 하면서 이 문제를 특정 세대의 남성 문제로 단순화해 버린다. 그러나 n번방 사건은 소라넷, 불법촬영, 버닝썬 사건 등 한국 남성들이 만들어온 '강간 문화'의 한 유형이다.
갑자기 나타난 돌연변이가 아니라는 이야기다. 본질적으로 여성을 성적 도구화한 남성문화가 변화하지 않으면, 이러한 문제는 다른 형태로 반복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허지웅 씨는 이것을 '남성'이 아니라 '세대'의 문제로 만들어버린다. n번방이라는 새로운 플랫폼에서 사건이 일어났을 뿐, 남성들이 계속해서 성착취를 해왔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이 지적은 명백히 잘못됐다.
더 문제적인 것은 '젠더갈등'이라는 말이다. 일단 젠더갈등이라는 말은 엄밀하게 따지자면 한국의 페미니즘 흐름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남성들의 반발에서 비롯된 것이다. 젠더갈등이라는 말은 굉장히 중립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백래시 현상이나 다름없다. 그렇다면 원인을 (최근의) 젠더갈등에 놓는다는 것은 결국 남성을 이해해주는 분석이 되어버리고 만다. '남자들이 그럴만하다'라는 서사가 자연스럽게 만들어지는 것이다.

성폭력 범죄자 친구를 둔 적이 있는가? 나는 없다. 만약 있다면 인연을 끊어버리고 싶을 것 같다. 그래서 조문을 가는 정치인들이 어떤 생각인지도 잘 모르겠다. 죄는 미워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자는 건지, 정치적 의리가 성폭행 같은 중범죄마저 덮어버릴 수 있는 건지 추측하기 어렵다. 그들에게는 안 전 지사가 여전히 '챙겨줘야 하는 우리 식구'인 걸까?
민주당이 '조문 원칙'을 정하고 조용히 왔다 가기만 했어도, 과거 정치적 동지의 어머니를 향한 순수한 추모라고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웬걸. 대통령, 국회의 장, 여당 대표, 여당 원내대표 등이 모두 조화를 보내고, 몇 몇 정치인들은 기자들 앞에서 안희정의 '말'을 전하고, 심지어 울먹이기까지 했다. 기자 앞에 선 정치인들은 대부분 안 전 지사를 안쓰러워 했다. '모친상을 당한 안희정'이 아니라, '교도소에 있는 안희정'에 대한 안쓰러움이었다.

165) 얼굴과 신상을 공개하지 않으면 진정성이 없다고 하고, 어쩔 수 없이 절박한 마음으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고 말하니까 선거에 개입하려는 목적이 있다고 한다. 이는 성 폭력 문제를 '진영 논리'로만 해석하는 이들의 억지에 불과하다. 피해자를 피해자로 인정하지 않는 목소리가 힘을 얻는 세상이 부끄럽고, 절망스럽다.

비장애인만 존재하는 것 같은 사회에서 장애인이 무언가를 할 수 없는 존재라는 편견은 강화되고, 그들의 불편은 '어쩔 수 없는' '당연한' 일처럼 여겨진다. 그러면서 장애인의 성취는 '장애를 극복'했다는 말로 치켜세운다. 이는 장애의 해결을 매우 사적인 방식에 있는 것처럼 왜곡하는 동시에, 장애를 불완전하고 '극복해야 하는' 상태에 있는 것으로 묘사한다는 점에서 문제다. 이처럼 비장애인 중심의 사회는 장애인을 애초에 '장애인은 그저 장애인'이라는 관점에서만 바라보므로, 장애인이 마주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지도 않는다. 장애인을 아예 '논외'의 몸으로 둔다.
비슷한 맥락에서 나는 질병인들을 '회복해야 할' '관리가 덜 된' 존재로 보는 것도 반대한다.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의 저자 조한진희 활동가가 제시한 질병권의 개념은 간단히 말하자면 아파도 괜찮을 권리다. 건강이 전부라는 말이 통용되고 실제로 건강을 잃으면 다 잃은 것처럼 여겨지는 사회에서 조한 활동가는 "회복되지 않는 아픈 몸으로도 어떻게 온전하고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을 것인가 라는 고민"에서 질병권을 말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노키즈존'은 어린이에 대한 차별이며, 남성에 비해 돌봄과 양육 시간의 비중이 훨씬 높아 대체로 가정에서 주양육자 역할을 하고 있는 여성들에 대한 차별이기도 하다. '노키즈' 처럼 간단하게 상황을 설명하고 해결하려는 단어가 없었다 면, 어린이의 출입을 막는 조치가 차별 행위 인지의 여부에 대해서 숙고하는 이들이 더 많았으리라.

왜 남성에게 페미니즘이 필요하냐고 물었을 때, 흔히 '맨박스(가부장제하에서 사회적으로 강요받는 남자다움)'를 벗어날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한다. 그 말도 옳지만, 나는 페미니즘이야말로 남성이 타인과 평등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길이라는 점을 더욱 강조하고 싶다. 무엇보다 한 사회 속에서 여성이 겪는 차별과 억압에 대해 이해하고 이를 변화시키기 위한 문제의식을 키울 때, 최소한 자신도 모르게 '억압자'나 '가해자'가 되는 일은 피할 수 있다. 더불어 관계에 대해 성찰할 수 있게 되면서, 기존 남성문화 속에서 키워온 '자기중심성'을 극복하고 상대를 이해하는 법을 터득할 수 있다.

'남자 어른'들이 먼저 변화하면 '남자아이들'도 변한다. 남성 페미니스트들이 굿곳에서 '남성 지배' 체계에 균열을 내고, 성평등 교육을 원하는 여론을 형성해서 아이들이 성에 대한 편견과 고정관념 없이 자라는 데 이바지해야 한다. 나아가 이제 남성에게도 페미니스트는 '민주주의자'처럼 시민으로서의 상식과 표준으로 여겨지길 바란다. 페미니스트가 아닌 것을 부끄러워해야 하는 세상에선 여성을 대상화하고 억압하는 남성이 자라날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