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기록/여성

이반지하의 공간 침투ㅣ이반지하ㅣ웃긴 책

기로기 2024. 10. 15. 23:10

예전에 친구의 소개로 알게 된 작가이자 화가인데, 도서관 신간 코너에서 발견하여 읽게 되었다. 그간 이 책 외에 다른 책도 내셨고 잘 살고 계셨구나 싶어 반가웠다. 원가족과 있었던 갈등, 고급 호텔에서 일하며 겪었던 일이 이번 책에도 종종 나온다. 살면서 힘든 일도 많지만, 그럼에도 유머와 위트가 넘쳐서 책 읽으면서 몇 번을 웃었는지 모르겠다. 진짜 웃기다. 심지어 전작은 제목이 <나는 왜 이렇게 웃긴가>. 이번 책에서 특히 레즈비언의 눈으로 본 이성애 결혼식장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이성애 결혼식에 간 게 15년 만이라는 게 놀라웠다. 작가가 직접 만든 단어라는 '정상 서포터'의 뜻도 의미심장하다. 책의 힘으로 나와 같은 세상에 살지만 다른 상황에 있고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서 좋다. 다음 책도 기대하며. 

 

 

87)다만 정신병을 갖기 전 육체에 보험을 들어놓는 명민함을 갖추지 못해 송구합니다. 그 정도의 상식과 약삭빠름도 없이 잘살아보려 했다는 게 면목 없습니다. 정신병을 생애주기에 맞춰 알뜰하게 앓았어야 .. 

 

113)"복 받으라는 말도 못 하겠다야." 2024년 구정을 맞아 또다시 '정상 서포터'가 필요했던 사장님은, 더이상 상대가 유효한 노동력이 아님을 알게 된 후 씁쓸한 한마디를 뱉었다. (정상 서포터 : 구정이나 추석처럼 정상가족들이 모여야 하는 명절에 그들이 부재한 자리를 채워주는 비정상들을 일컫는 말. 24시 편의점을 비롯한 다양한 서비스와 노동의 현장에서 그들을 대신해 자리를 지켜 국가와 사회가 한시라도 무너지지 않도록 지탱한다. 한국의 정상가족은 정상 서포터 없이 모이거나 유지될 수 없다. 이반지하가 만든 개념이자 단어이며, 이반지하의 두번째 책 <나는 왜 이렇게 웃긴가>(2023)에서 처음 소개되었다.)

 

262)(여성과 남성의 결혼식에서)한복을 입은 어르신들을 그렇게 많이 본 것은 거의 난생처음이었다. 그들과 같은 행사를 치르러 왔다는 것이 놀라웠다. 새삼 성소수 행사들에는 '진짜 늙은이'들이 없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없는 것은 없는 대로 익숙하고 자연스러워 당연하게 여겨왔는데, 이렇게 각종 젊은이와 늙은이, 어린 아이까지 뒤엉킨 행사에 당도하자 감각하지도 못했던 결핍이 즉각 체감되었다. 있는지도 몰랐던 구성들이 여기엔 기본 찬으로 깔려 있다. 이게 공식, 메이저, 메인스트림의 맛이구나. 우리가 쉽게 동원해내지 못할 이들이 여기엔 너무 많이 있었다. 

 

264)충격이었다. 헤테로 단 두명이 한날한시에 동원해낸 사람 수도 수거니와, 그것도 모자라 모두와 아는 사이도 아니라는 사실이. 물론 이것은 이들의 부모와 그들이 그간 넘들의 자식을 축하해온 빚을 한번에 탕감해내는 행사라는 걸 들은 적이 있었지만, 직접 두눈으로 그 현장을 보니 몹시도 기이했다. 어느 행사든 사람 모으기가 쉽지 않은 요즘인데 이런 열성적인 참여 ...

 

275)막상 식의 일부가 되어 이들을 구경하고 있으니, 짧게나마 나름 통속적인 감동이 느껴지긴 했던 것이다. '이제 부부가 되어 처음으로 양가 부모님께 인사를 드립니다. 사랑으로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멘트 하에 어떤 사정들은 너무나 압축되고 생략되어 있었지만, 분명 삶의 큰 변화에 앞서 지금까지의 시간을 함께해준 이들에게 감사와 응원을 주고받는다는 그 사실 하나는 사람을 울컥하게 하는 구석이 있었다. 오랜 세월 무관심하게 비웃어왔던 이 의식에 대해 인간적인 이해를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291)이런 식으로 확장하다보면 정상사회로 돌아가는 길마저 남김없이 핥아 없애버릴 것만 같다. 안 그래도 자주 이탈하는 경로란 말이다. 그러므로 오늘은 현무암을 입안에서 농락해본 것만으로 만족하기로 한다. 범퍼를 가는 데는 기십만원이 깨질 것이고 고급 수제 초콜릿도 내 돈으로 샀지만 여전히 나는 어떤 앙갚음을 해냈다고 믿는다. 믿기로 한다. 

 

325)강간은 왜 이리 예술 서사에서 뛰어난 기능을 갖고 있나. 무대 위 강간에 대해선 으레 관객 모두가 어마어마한 피해라고 그 폭력성을 단번에 수긍하기 때문일까. 현실 강간은 그게 범죄이고 피해라는 걸 인정받기까지 여전히 너무 많은 이들이 의구심을 갖고 중립 얘기를 하시는데, 예술로 넘어가면 갑자기 모두가 저것은 진짜! 고난이고 진짜! 고통이라는 데에 쉬이 동의하는 것 같다. 강간은 인생을 망쳐버린다고! 

 

351)부자들은 부자라는 말을 불편해한다. 아직은 각자가 생각하는 진짜 부자에 못 미친다고 생각하기 때문일까. 그들도 올려다보는 법만을 알고 있기 때문일까. 진짜 부자가 되려고 조용히 애쓰고 있는데 내 쪽에서 '부자'라는 샴페인을 빵 터뜨려버려 불쾌한 것일까. 아니면 본능적으로 혁명을 당할까봐 몸을 사리는 것일까. 자기들을 부자라고 부르는 거지들이 일제히 찾아와 문을 두드리며 자신들의 원대한 꿈과 야망을 탐욕이라 부를까 지레 겁을 먹는 것인가. 자기보다 더 부자도 있는데 겨우 자기 정도에 대해 입방아를 찧을까봐 그런 건가. 근데 입방아를 찧는다는 말, 너무 귀엽지 않나. 입으로 방아를 찧는다니. 아무튼 부자들은 그런 것을 싫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