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기록/여성

제가 해보니 나름 할 만합니다ㅣ김영우ㅣ40대에 깨달은 가부장

기로기 2024. 9. 6. 20:02

40대 남성이 쓴 에세이인데, 소개를 읽어보니 책을 읽지 않을 수 없었다.

 

- 40대에 시작한 전원생활, 독립서점, 가사 노동, 채식
- 평범과 평균, 간혹은 그 이하를 오가며 살았다고 생각했다. 한마디로 평생 비주류, 2군, 무명씨였다. 그런 줄 알았는데 가부장제만큼은 엘리트 코스를 밟으며 너무나 편하고 안전하게 살아 왔음을 뒤늦게 깨닫고는 당혹감과 부끄러움과 억울함에 몸 둘 바를 모르고 있다. 

 

40대에 이런 각성을 하다니..! 진짜 희귀하지 않나? 너무 궁금했다. 그 계기는 무엇이었는지, 어떤 변화를 맞이했는지.

책 표지는 밝고 유머러스할 것 같은 느낌인데 무겁고 비극적인 내용도 담겨 있어서 사람 살아가는 게 참 기쁜 일만 있을 순 없구나 싶었다.

요즘 에세이를 읽으면, 이렇게 실명으로 자신의 삶을 공개적으로 글로 낸다는 용기가 대단하다고 느낀다. 


본인이 고기를 먹지 않게 되었지만 가족들에게는 전혀 강요하지 않는 점도 대단하다. 

 

이혼을 숨기고, 이혼한 전부인의 이름을 가문 족보에 올리는 등 결혼의 유지라는 정상성에 집착했던 과거의 이야기는 충격 그 자체였다... 이 정도라고? 아직도 이런 사람들이 있겠지? 우리 세대가 중장년층이 되면 이런 일은 거의 사라지려나?

 

시골에서 아이 키우고 분교에 보내면서도 자녀가 경쟁에서 이겨 시험에서 만점 받고 좋은 대학 입학하길 바라는 대목에서는, 부모 마음이라는 건 부모가 아무리 깨어있는 사람이라도 어쩔 수가 없나 싶어서 놀랍기도 했다.

 

자신의 이야기와 반성과 의견들이 담겨 있어서 진정성 있는 좋은 책이었다. 저자가 여성주의를 알게 된 책은 리베카 솔닛의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였다. 정말 놀랍게도 나의 친구도 자신의 인생을 바꾼 책으로 이 책을 꼽았다. 여러 사람의 인생을 바꾼 엄청난 책이다.

 

 

하지만 아주 가끔은 홀로 너무 동떨어져 사는 건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었다. 모두가 열심히 '달리는' 시기인 40대에 나만 대열에서 이탈해 엉뚱한 곳에 있는 건 아닌가 하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가뜩이나 주류와 거리가 먼 삶을 살면서 심지어 시류에도 따르지 않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여유도 없는 주제에 부가가치 없는 일만 하는 건 아닌가 하는 혼란도 이어졌다. 잊을 만하면 터지는 아파트 가격 폭등에 대한 뉴스는 내 불안을 부추기기에 충분했다. 친구들은 '억, 억'거리며 아파트값이 얼마나 올랐느니 하는 은근한 자랑을 감추지 않았다. 지인들은 자기 아이들의 치열한 학업 생활을 늘어놓으며 교육, 그러니까 구체적으로는 '대학 입시'를 위해서라도 아이가 더 크기 전에 다시 서울로 돌아가야 하는 것 아니냐는 충고를 슬슬 꺼내 들었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위축되는 마음을 내색하지 않기 위해 신경을 곤두세워야만 했다.

그러자 아내는 미처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을 지적했다. "미뤘으면 못 왔지. 돈이 목적이었으면 돈 때문에 못 왔고, 애 교육이 목적이었으면 그것 때문에 못 왔겠지. 그리고 그때 오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사는 우린 없지. 10년 동안 가평에 살면서 생각이 얼마나 많이 바뀌었는데. 전혀 다른 세계에서 다른 방식으로 살았을 자신이 어떻게 지금과 같았을 거라고 생각해? 더구나 그때 애가 아팠고 여기서 건강하게 컸다는 걸 잊지 말도록!"

언젠가 시인 겸 출판인이자 선배 서점인으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있다. 책을 만드는 건 끝내주는 아이디어도 탁월한 문장력도 아니라고. 오직 완성된 원고만이 책을 만드는 것이라고. 다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실천이자 노동이라는 말로 나는 이해했다. 입으로만 떠드는 건 아무 소용이 없으며,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어떤 결과도 가져오지 못한다. 최근에 가장 좋아하는 단어 가운데 하나가 최윤필 작가의 <가만한 당신>에서 발견한 '완전 연소'다. 효율이 높다는 의미가 아니라 할 수 있는 건 다 해본다는 의미로 이 말을 애착한다.

그때는 그때 나름의 이유로 그럴 수 있었고, 당시에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겠지만 지금은 또 지금 나름의 판단으로 이렇게 할 뿐이다. 시기마다 추구하는 가치와 매력은 달라지기 마련이며, 그때 중시했던 것이 지금은 별게 아니게 되거나 그 반대의 경우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네가 아직 철이 없어서 하는 소리지, 알고 보면 그때가 제일 좋은 때"라는 말은 권력의 언어다. 그리고 심각한 모순의 말이기도 하다. 그 시절과 지금이 같지 않고, 각각의 시절을 겪는 주체의 상황도 같을 수 없다. 시절이 다르고 주체가 다른데 도대체 자기가 겪었던 과거가 무슨 근거로 객관적인 상황일 수 있는가. 어떻게 그 기준으로 상대의 지금이 좋은지 나쁜지 감히 판단할 수 있는가.

가사 노동은 일주일 내내 특별할 것 하나 없으면서도 매일 하루하루를 바쁘게 흘러가도록 만든다. 한편으로는 묘하게 매력적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깊은 함정에 빠지게 만드는 양날의 검 같다. 가장 직접적이고 본질적인 삶의 영역, 즉각적이며 기본적인 생산 노동, 덕분에 식구들의 생활을 영위하게 하는 가치 있는 활동이라는 점에서 보람을 느낀다. 소통의 활로를 만들어주기도 한다. 하지만 누적되는 건 오직 피로뿐이고 때가 되면 리셋되어 새로 시작해야 하는 무한 반복의 일, 누군가는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지루하고 귀찮은 노동, 무엇보다 보상도 부가가치도 좀처럼 찾을 수 없는 '평가 열외' '비가시화'의 영역이라는 점에서는 무거운 족쇄가 아닐 수 없다. 이 무게가 많은 여성들의 경력을 단절시키고 성장을 가로막고 기회로부터 소외시켜 사회적으로 걸림돌로 작용한다는 건 말할 것도 없다. 

새삼스레 이곳이 남자들이 얼마나 살기 좋은 세상인지 절감했다. 그건 가사 노동을 떠안는다고 달라지지 않는 거였다. 아니 남자의 가사 노동은 오히려 특별한 매력으로 작용했다. 요리를 잘한다고, 착하다고, 나는 있는 모습 이상의 과도한 호감과 칭찬에 둘러싸였다.

여자니, 남자니, 아줌마니, 아재니, 학생이니 하는 규격이 만든 전형성이 불편한 건, 거기에서부터 상대를 범주에 가두려 하거나 특정한 타인으로 구분하기 때문이다. '에이, 아닌 거 같은데?'를 숨기지 못하는 눈빛은 그나마 다행이고 대놓고 자신만의 확증을 드러내는 이에게는 대책이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바라는 일은 상대로부터 어떤 전형성을 찾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그 자체로 바라보는 것이다. 내가 가진 개성과 역사 전부를 합친 결과물로 지금의 나를 인정받고 싶듯이 상대 역시 그만의 개성과 역사가 존재할 것이므로.

가부장제 질서를 가장 강화하는 곳은 두말할 것도 없이 가정이다. 우리는 배우고 익힌 대로 관성적으로 아이들을 길들인다. 딸을 '여자'로 만들지 않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들을 '남자'로 규정하지 않는 것이 아닐까? 억울한 딸들은 언제든 각성할 수 있지만 편리함에 익숙해진 아들은 좀처럼 그러지 않을 것 같아서 걱정이다.

결혼과 행복을 등가로 이해하게 만드는 설정은 근거도 없고 너무나 위험해 보였다. 만약 그들이 행복했다면 그건 삶에 대한 성실한 노력과 여러 행운이 겹친 결과물일 뿐 결코 결혼 덕분이 아닐 것이다. 오히려 서로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가 결여된 '졸속' 결혼은 생활 방식과 삶의 태도, 세계관 등에서 상당 기간 크고 작은 갈등을 빚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이혼의 확률도.

나는 잭이 자신의 죄악을 정당화할 목적으로 거인이 다른 문화를 가진 '타자'임을 이용했다고 본다. 그런 의미에서 <잭과 콩나무>는 내게 혐오 문제를 어떻게 왜곡하는지 보여주는 이야기였다. 자신과 다르다는 이유로 상대를 괴물로 낙인찍고 마녀사냥하고 이를 정당화하는 일은 얼마나 반복적이고 악의적인가. 가깝게는 이민자 문제도 있고, 뿌리 깊기로는 동성애자 문제도 있다.

아내는 많은 남성들이 여성에게 수치심과 불쾌감을 주는 행위에 대해 '순정'이라고 착각하고 억울해하는 것을 답답해했다. 여러 측면에서 약자일 수밖에 없는 여성은 상황이 어긋나지 않기를 바라며 좋게 거절하려고 하는데 남자들은 그 신호를 모르고 선을 넘는다면서 말이다.

여러 차례 밝히지만 나는 식구들에게 고기를 먹지 않는 것에 동참하라고 할 권한이나 자격을 갖고 있지 않다. 고기 소비 문제를 개인의 결정으로만 짐 지우는 건 본질적 해결책이 아니며, 개인의 결정 역시 스스로 느끼고 선택해야 할 일이기 때문이다. 나의 생각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상대의 취향과 가치도 존중해야 한다.

강아지에게조차 성별 이미지를 연결시키는 내 안의 뿌리 깊은 성 고정관념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심지어 이런 일도 있었다. 어느 날 큰아버지가 며느리들도 족보에 올리겠으니 이름을 알려달라고 했다. 아버지는 형의 이혼한 전처 이름을 알려줬다. 나는 나를 향해 어쩔 수 없지 않느냐는 표정을 짓는 아버지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뒤늦게 여성주의 책들을 뒤적이다가 지금까지 절대적으로 믿고 있던 가치들이 실은 가부장제의 통념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충격적으로 이해되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 하나가 결혼이란 그저 제도일 뿐이라는 것이었다. 나는 이전까지 너무 의심 없이 결혼을 통과의례로 받아들였다. 동서고금을 막론한 진리라고 말이다. 적당한 시기가 지나면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그럭저럭, 옹기종기, 알콩달콩, 대충대충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만큼 비혼과 이혼에는 지나치게 부정적인 인식을 갖고 있었다. 나이를 먹고도 결혼하지 않는 사람, 이혼하는 사람은 '하자'가 있는 사람, 어딘가 부족한 사람, 이상한 사람, 흠결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상상하지 않고 의심하지 않으면서 가부장제의 수혜를 받았다. 어느 순간 방조와 침묵을 일상화하고, 그에 걸맞은 충분한 대가를 받았다. 그 혜택과 편리가 누군가 살면서 내내 겪는 어려움과 불편과 차별과 위협의 기반 위에서 자란 열매라는 사실을 간과한 채 말이다. 이제 이 사실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최소한 주어진 여건 안에서라도 변화를 모색해야 했다. 그것은 주저 없는 의심, 그러니까 상상력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것은 여성주의에 매료된 이유이기도 했다. 여성주의가 단순히 여성에게 동등한 권리를 제공하라는 주장인 줄만 알았다. 그런데 차츰 학습하며 알게 된 본질은 기존의 진실을 의심하고 새로운 상상력을 발휘하는 인식론, 소외되고 차별받은 사람이 없는지 끊임없이 살피고 성찰하는 철학이었다. 그렇게 의심하고 상상하고 도전하며 보다 새로운 미래를 추구하는, 가장 역동적이며 미래적인 사상이었다. 나는 여성주의를 배워나가며 당연하다고 믿었던 것이 불합리하다는 사실을 알았고,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실은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아가고 있다. 사는 내내 절대적으로 믿고 있던 질서들이 제도일 뿐이라는 사실을, 단단했던 신념들이 편견에 찌든 고정관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빛나게 바라보았던 가치들이 강요된 아름다움에 다름 아니라는 사실을 배우고 있다.

엄마의 인생 모토는 당시의 여느 엄마와 다름없이 오직 '남들처럼 평범하게 사는 것'이었다고 미루어 짐작한다. 문제는 언제나 '남들'이란 불분명한 존재들이라는 사실이다. 실제로 엄마는 틈만 나면 '남들처럼' 쪼들리지 않고, '남들처럼' 자식들이 말 잘 듣고 공부해 대학에 가고, '남들처럼' 결혼해서 평범하게 살기를 바랐다. 그토록 바라던 가족의 '평범'을 위해 어떠한 불이익도 마다하지 않았는데, 자신을 위해서는 일말의 사치도 포기한 채 희생만 하다가 끝내 어느 하나 제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이 가운데 가장 상상력이 부족했던 건 나였다는 사실을 부정하기 힘들다.

아이에게, 소원이 금세 이뤄질 거라고, 곧 아주 긴 머리카락을 가지게 될 거라고 말해주었다. 하지만 돌이켜 보면 조금 다르게 얘기해줘도 좋았을 듯하다. 남자라고 무조건 머리카락이 짧아야 하고 여자라고 꼭 머리카락이 길어야 할 필요는 없다고. 머리 모양은 오직 개인의 선택이고 고작 머리 모양으로 상대를 판단하고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된다고. 여자아이가 머리카락이 짧은 것에 대해 지적한다면 무식하고 무례한 그 상대가 비난받을 일이지 그것 때문에 위축되거나 숨을 일이 아니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