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기록/여성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ㅣ리베카 솔닛ㅣ김명남 역ㅣ누군가의 인생을 바꾼 그 책

기로기 2024. 10. 14. 22:54

예전부터 페미니즘 입문서로 유명했던 책으로 기억한다. <제가 해보니 나름 할 만합니다>를 쓰신 남성 저자가 여성주의에 입문하게 된 계기가 된 책으로 소개했는데, 이후 만난 친구도 본인 인생을 바꾼 책 중 하나로 언급해서, 내가 혹시 이 책을 안 읽었다면 당장 읽어봐야겠다 싶어 찾아보니 읽지 않은 책이 맞았다. 참고로 나의 입문서는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로 기억한다. 

 

책 시작부터 나오는 에피소드가 매우 흥미롭다. 어떤 부자 중년 남성이 주최한 파티에서 최근에 나온 책에 대해서 (그 책을 읽지도 않고 언론에 실린 리뷰만 읽고서) 아는 척을 해대는데 그 책이 바로 리베카 솔닛 본인의 신간이었고, 그 사실을 알려줬음에도 아랑곳 않고 계속 저자 본인 앞에서 맨스플레인을 시전했다는 거다. 실화였다. 책 쓴 사람 앞에서 읽지도 않은 책을 일장연설이라니...! 물론 이 에피소드를 세상에 소개한 건 리베카 솔닛이었지만 '맨스플레인'이라는 단어를 만든 건 솔닛 본인이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솔닛은 그 단어에 대해 신중한 입장을 취했다. 하지만 이 에피소드는 '맨스플레인'에 정말 찰떡이다.

 

리베카 솔닛 필력이 아주 좋다는 걸 느낄 수 있었고 이후에 낸 책들도 하나씩 읽어보고 싶어졌다. 

 

 

31)덕분에 나는 여성이 사회에서 겪는 사소한 괴로움, 폭력으로 강요된 침묵, 그리고 폭력에 의한 죽음이 모두 하나로 이어진 연속선상의 현상들이라는 사실을 똑똑히 깨달았다(그리고 우리가 여성 혐오와 여성에 대한 폭력을 더 잘 이해하려면 힘의 오용을 총체적으로 바라보아야만 한다. 가정폭력을 강간, 살인, 성희롱, 협박과 별개의 문제로 취급하지 말아야 하고, 온라인과 가정과 직장과 거리를 전부 아울러야 한다.)

 

45)그 남자는 자신이 고른 피해자에게는 아무런 권리도 자유도 없지만 자신에게는 그녀를 통제하고 처벌할 권리가 있다는 사고방식을 갖고 있었던 셈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폭력은 무엇보다도 일단 권위주의적이라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폭력은 내게 상대를 통제할 권리가 있다는 전제에서 시작한다. 살인은 그런 권위주의의 극단적 형태다. 

 

111)내가 지금보다 젊었을 때, 드넓은 대학 캠퍼스에서 여학생들이 강간을 당하자 대학 측은 모든 여학생에게 해가 지면 밖에 나가지 말라고, 아니면 아예 나돌아다니지 말라고 일렀다. 건물 안에 있어라. 그러자 웬 장난꾸러기들이 다른 처방법을 주장하는 포스터를 내붙였다. 해가 진 뒤에는 캠퍼스에서 남자를 몽땅 몰아내자는 처방이었다. 그것은 똑같이 논리적인 해법이었지만, 남자들은 겨우 한 남자의 폭력 때문에 모든 남자더러 사라지라는, 이동과 참여의 자유를 포기하라는 말을 들은 데 대해 충격을 감추지 못했다. ... 지난 수천년 동안 여자들이 공적 영역에서, 계보도에서, 법적 신분에서, 목소리에서, 삶에서 사라진 것은 뭐라고 불러야 할까? 

 

169)우리는 여전히 말할 권리와 신뢰받을 권리를 누구에게 줄 것인가를 두고 씨름하는 시대에 살고 있는데, 더구나 요즘은 양쪽에서 압박이 온다. 남성권리운동과 대중적으로 퍼진 숱한 오보들 때문에, 사람들은 요즘 성폭행 무고가 만연했다고 여기곤 한다. 집단으로서 여성은 신뢰할 만하지 못하고 오히려 거짓된 강간 고발이 진짜 문제라는 암시는 개별 여성을 침묵시키고, 성폭행에 관한 토론을 회피하게 만들고, 남성을 주된 피해자로 부각하는 도구로 쓰인다. 이런 설정을 보면 나는 유권자 부정행위에 관한 설정이 연상된다. 미국에서 유권자 부정행위는 워낙 드문 범죄이기 때문에, 아주 오랫동안 선거 결과에는 아무런 심각한 영향을 미치지 못한 듯하다. 그럼에도 근래 보수주의자들은 그런 부정행위가 널리 퍼졌다고 주장함으로써 자신들에게 표를 던지지 않을 것 같은 사람들 - 가난한 사람, 백인이 아닌 사람, 학생 - 의 투표권을 박탈했다. 여자들과 아이들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다. 거짓말은 남자도 여자도 아이도 한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여자와 아이가 유독 거짓말을 많이 하는 습성인 것은 아니고, 남자라고 해서 유독 진실한 것은 아니다. 내 주장은 여성이 거짓말을 잘하고 음험하다고 보는 낡은 설정이 여태 일상적으로 제기된다는 것이며, 우리가 그 현상을 있는 그대로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180)아일라비스타 살인자는 여자만이 아니라 남자도 죽였다. 그러나 그가 벌인 광란극의 목표는 여학생 클럽의 회원들을 처단하는 것이었던 모양이다. 그는 자신의 여자들에게 성적으로 접근하지 못하는 상황을 여자들이 자신에게 모욕을 가하는 상황으로 해석했던 듯하다. 자신에게 권리가 있다는 의식과 자기연민이 슬프게 뒤섞인 감정 상태에서, 그는 여자들에게는 자신을 만족시킬 의무가 있다고 믿었다.

 

182)특히 여자들이 억압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남자들이 상투적으로 보이는 반응, 즉 '모든 남자가 다 그렇진 않아'라는 반응을 비판하는 말이었다. 일부 남자들은 솔직히 "나는 안 그런데"라고 말하고 싶어서거나 아니면, 현실의 시체나 피해자는 물론이거니와 현실의 범인을 논하는 문제로부터 방관자 남성들의 안락함을 보호하는 문제로 대화의 초점을 돌리기 위해서 그런 반응을 보인다. 한 여성은 격분해서 내게 말했다. "남자들은 대체 뭘 바라는 거예요, 여자를 때리거나 강간하거나 위협하지 않는다고 상으로 과자라도 받고 싶은 거예요?"

 

여자들은 늘 강간과 살해를 두려워하면서 산다. 때로는 그런 문제를 이야기하는 것이 남자들의 안락함을 보호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 제니 추라는 여성은 트위터에서 이렇게 말했다. "물론 모든 남자가 다 여성 혐오자나 강간범은 아니다. 그러나 요점은 그게 아니다. 요점은 모든 여자는 다 그런 남자를 두려워하면서 살아간다는 점이다."

 

191)강간문화란 강간이 만연한 환경, 미디어와 대중문화가 여성에 대한 성폭력을 규범화하고 용인하는 환경을 말한다. 강간문화는 여성 혐오 언어의 사용, 여성의 몸을 대상화하는 시선, 성폭력을 미화하는 태도를 통해서 지속되며, 그럼으로써 여성의 권리와 안전을 경시하는 사회를 낳는다. 강간문화는 모든 여성에게 영향을 미친다. 대부분의 성인 여성과 여자아이는 강간을 염려하여 자신의 행동을 제약한다. 대부분의 성인 여성과 여자아니는 강간을 두려워하면서 살아간다. 남자들은 일반적으로 그렇지 않다. 따라서 강간은 여성 인구 전체가 남성 인구 전체에게 종속된 위치에 머물도록 만드는 강력한 수단으로 기능한다. 대부분의 남자들은 강간을 저지르지 않고 대부분의 여자들은 강간 피해자가 되지 않는데도 말이다. 

 

193)많은 경우 강간의 동기는 남자가 여자의 욕망과는 무관하게 자신이 그녀와 섹스할 권리가 있다고 믿는 마음이었다. 한마디로 남자의 권리가 여자의 권리에 앞선다는 생각, 혹은 여자에게는 권리가 없다는 생각이다. 이렇듯 여자가 남자에게 섹스를 빚지고 있다는 생각은 어디에나 퍼져 있다. 내가 어렸을 때처럼 요즘도 여자들은 우리의 어떤 행동이, 어떤 말이, 옷차림이, 우리의 모습 자체가, 우리가 여성이라는 사실 자체가 남자에게 욕망을 불러일으켰으므로 응당 그 욕구를 만족시켜주어야 한다는 말을 듣는다. 우리가 그들에게 빚을 졌다는 것이다. 그들에게 우리에 대한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남자들이 자신의 감정적, 성적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상황에 분노로 반응하는 것은 너무나 흔한 현상이다. 다른 여자들이 자신에게 했거나 하지 않은 일을 갚아주기 위해서 엉뚱한 여자를 강간하거나 처벌해도 된다는 생각도 마찬가지다. 올봄에는 십대 여자아이가 고등학교 졸업 파티에 함께 가자는 남자아이의 초대를 거절했다는 이유로 칼에 찔려 죽은 사건이 있었다. 2014년 5월 14일에는 두 아이의 엄마인 45세 여성이 만나던 남자로부터 '거리를 두려고 한다'는 이유로 살해되었다. ... '성적 권리의식'이라는 용어는 아일라비스타 살해사건 직후에 사방에서 갑자기 나타났고, 사람들은 블로그와 논평과 대화에서 날카롭고 매서운 표현으로 그 현상을 논하기 시작했다. 2014년 5월은 그 용어가 일상 언어에 진입한 시점이 아닐까 싶다. 그 용어는 사람들로 하여금 이 현상의 표출을 인식하고 지탄하게끔 도울 것이다. 상황을 바꾸는 것을 도울 것이다. 언어는 중요하다.

 

219)여성 유명인사들의 육체와 사생활을 순찰하면서 쉴 새 없이 트집을 잡는 타블로이드들이 있다. 너무 뚱뚱하다느니, 너무 말랐다느니, 너무 섹시하다느니, 너무 안 섹시하다느니, 너무 오래 독신이라느니, 아직 애를 안 낳았다느니, 애를 낳을 기회를 놓치고 있다느니, 애는 낳았지만 적절히 양육하지 못하고 있다느니... 그러면서 그들은 모든 여성의 야심은 훌륭한 배우, 가수, 자유의 대변인, 모험가가 되는 것이 아니라 현모양처가 되는 것이라고 가정한다. 유명한 숙녀들, 상자로 도로 들어가시죠. 패션잡지와 여성잡지는 독자에게 그런 목표를 추구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데, 혹은 그런 문제에 관해서 독자에게 무엇이 부족한지를 아려주는 데 많은 지면을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