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기록

개소리에 대하여ㅣ해리 G. 프랭크퍼트ㅣ최소한의 노력도 없는 개소리

기로기 2024. 9. 4. 23:56

놀라운 점은 이 글이 나온 게 최근이 아니라는 것. 무려 80년대 글. 개소리는 옛날부터 있어왔다는 것.

이런 책을 읽으면서도 본인의 코딱지를 책에 묻혀야만 하는 인간이 존재한다는 것.

 

이 책은 어떤 책 속에서 소개되었는데 어느 책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출판사가 최근 인상깊게 본 <인공지능이 할 수 있는 것, 할 수 없는 것>을 낸 곳이다. 

 

이 글을 읽으면서 가장 대표적인 한 사람이 떠오르는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을 듯.

만만치는 않지만 길지 않으니 도서관에 들른다면 읽어보길 추천한다. 

 

(아래 글은 저자가 쓴 글은 아니고, 저자의 글을 읽은 분의 리뷰가 책에 실린 것인데 아주 좋았다.)

 

개소리 현상의 본질이 무엇인지, 그것이 왜 중요한 사회 문제인지를 밝혀낸다. 저자의 분석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개소리가 거짓말보다 위험하다는 주장이다.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적어도 자기 말이 진리인 것처럼 포장하기 위해서라도 진리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은 보여주는 데 반해, 개소리를 하는 사람은 자기 말이 진리든 거짓이든 전혀 상관하지 않는다 것, 한마디로 진리에 대해 무관심하다는 것이다. 사랑의 반대가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이라는 말과 유사하게, 진리의 가장 큰 적은 거짓말이 아니라 개소리가 된다. 더욱이 개소리는 거짓말보다 편리하다. 거짓말을 지어내는 데는 생각보다 엄격한 지적 엄밀성과 장인정신이 필요하다. 무엇이 진리인 줄 모르는 자는 거짓말을 할 수 없기 때문이며, 완벽하게 꾸며내지 못한 거짓말은 금세 들통나기 때문이다. 반면 개소리는 그 말의 뜻에서부터 '엉터리'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데서 알 수 있듯, 굳이 공들여 만들 필요가 없다. 단지 약간의 뻔뻔함만 있으면 된다. 또한 거짓말은 거짓임이 들통나면 커다란 비난이 쏟아지지만, 개소리에 대해서는 그저 어깨만 으쓱하고 지나칠 뿐이다. 거짓말이 실패하면 수치스럽지만, 개소리는 실패하더라도 관용된다. 개소리에 대해서 정색하고 달려들면 웃자고 하는 소리에 죽자고 달려든다고 역공을 받는다. 사람들은 개소리가 실패의 책임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롭다는 점을 깨닫고는 개소리의 무책임을 누리기 위해 말에서 진리치를 희석한다. 개소리로 돌파할 수 있는 곳에서는 굳이 거짓말을 할 필요가 없다. 결정적으로 개소리는 거짓말보다 강력하다. 예를 들어 미국의 보수정치가 트럼프는 진리에 대한 철저한 무관심 때문에 그처럼 강력하고 효과적일 수 있었다. 트럼프의 말이 사실인가? 그러면 좋다. 트럼프의 말이 거짓인가? 그래도 좋다. 

 

그 지지자들은 참과 거짓이라는 진릿값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논리적 공간에서 언어 게임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런 개소리에 대해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아직까지 효과적인 방법을 찾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그 이유 가운데 하나는 개소리와 거짓말을 혼동하고 있기 때문인 듯하다. 그래서 거짓말쟁이에게 대응하듯 팩트를 가지고 그들의 말이 거짓임을 폭로하려고 하지만, 개소리쟁이들은 거짓말로 들통나도 거의 타격받지 않는다. 개소리는 거짓말과는 다른, 진위가 전혀 문제 되지 않는 언어게임이기 때문이다. 맥스 블랙은 《협잡의 만연》에서 “협잡은 항상 타인에 의해 행해지는 것이라는 특이한 속성이 있다"라고 비꼰 바 있다. 이는 특히 정치 분야에서 우리편의 개소리는 개소리로 들리지 않는다는 익숙한 사실을 통해 쉽게 검증된다. 

 

윤석열의 “날리면"은 조고의 "지록위마와 마찬가지로 진리에 대한 무관심의 수준을 넘어 진리에 대한 무시와 경멸을 보여주는 권력행동이다. 자신이 진리 위에 있음을 만인에 선포하는 위력행사다. 조고의 편에 선 신하들이 사슴을 말이라고 믿은 것이 아니듯이, 윤석열의 옹호자들이라고 '날리면'이라는 개소리를 사실로 믿는 것은 아니다. 반대 진영에 맞서 우리 편 대오를 통일하여 비속어 발언으로 인한 정치적 난관을 돌파하기 위해 속아주는 척하는 것일 뿐이다. 왜 권력형 개소리가 특히 문제일까? 통상적인 개소리는 발언의 내용보다는 자신의 기획의도를 상대에게 속인다는 것이 프랭크퍼트의 통찰이다. 그런데 권력형 개소리는 자신의 기획의도를 굳이 숨기는 것 같지 않다. 자기 속셈을 누군가 알아채지 못하게 속이려 한다는 것은 타인이 자신의 속셈을 아는 것을 두려워한다는 것을 전제한다. 즉 타인의 존재가 자기에게 미치는 영향력을 염려하고 있다는 것이고, 이는 타인에 대한 일말의 존중이 (두려움에서 비롯된 것일지언정) 남아 있다는 뜻이다. 반면 권력형 개소리는 사태의 진실이 무엇인지에 대해 신경쓰지 않는 것을 넘어, 타인이 자신의 속셈을 알든 말든 개의치 않는 행태를 보인다. 이는 자신이 진리보다, 타인보다 힘의 우위에 있다고 간주하는 데서 비롯된다. 따라서 권력형 개소리는 진리에 대한 무시와 타자에 대한 멸시라는 이중적 악을 수반한다는 점에서 일반적 개소리보다 더 심각한 사회적 해악이다. 권력형 개소리가 굳이 숨기지 않는 기획의도는, 적과 동지를 구분하여 우리편을 규합하고 상대편에 맞서려는 것이다. 이 권력형 개소리의 언어게임에서는 사슴을 사슴이라고 진실을 말하는 자는 적이 되고, 사슴이 말이라고 거짓을 말하는 자가 동지가 되는 독특한 규칙이 적용된다. 이에 따라 권력형 개소리에 대해 팩트 체크로 대응하는 것은 사실을 바로잡는 진리주장이 아니라, 권력에 반대하는 정치행동으로 간주된다. 조고가 사슴을 사슴이라고 사실대로 말한 신하들을 제거했듯이, 윤석열 정부가 바이든을 바이든이라고 말한 언론을 상대로 정치보복을 자행한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따라서 팩트 체크를 권력형 개소리에 대한 해결책으로 보는 것은 순진한 생각이며, 아직 이 언어게임의 규칙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개소리에 대하여》는 아직 인터넷과 SNS가 나오기 전, 당파성을 내세운 케이블 뉴스 전문채널이 나오기 전, 그러니까 개소리가 언론과 정치권의 보편적인 화법이 되기 전인 1986년에 쓴 논문에 바탕을 둔 책이다. 그래서 저자가 든 사례는, 자기 분야가 아닌 사안에 대해 부득이 발언해야 하는 공인들이나 농담 한번 잘못했다가 비트겐슈타인에게 봉변을 당한 파스칼의 일화처럼, 상대적으로 무해해보이는 개인적 수준의 사안들뿐이다. 따라서 <협잡의 만연》에서 맥스 블랙이 제시한 버나드 쇼식 개소리 대처법("당신 정말로 그걸 믿는단 말인가요?" 라고 다소 무례하지만 순진한 척 반문하기)도 당시로서는 진지한 제안으로 여겨질 수 있었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보는 것은 산업화된 개소리다. 2016년 대선에서 트럼프의 막말을 시시콜콜 보도한 미국 언론이 역대 최고의 수익을 기록하고, 결국 트럼프가 당선되었다는 사실에서 보듯 지금은 개소리가 돈이 되고 표가 된다는 것이 검증된 시대이다. 한국 역시 인터넷 20년, 종편 10년 만에 언론이 개소리의 생산과 유통을 통해 먹고사는 업종으로 탈바꿈한 현실을 목도한 바 있다. 격투기 중계 하듯 하루 종일 당파적 콘텐츠를 쏟아내는 종편과 포털, 유튜버들이 제조해내는 잡담 수준의 가짜뉴스들은 마약만큼이나 중독성 있는 상품이다. 하이데거가 말한 말초적 호기심과 무의미한 잡담에 몰두하는 비본래적 세인das Man은 오늘날 손에서 휴대폰을 놓지 못하는 숱한 가짜뉴스 중독자들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100년 전 하이데거가 비판한 비본래적 실존은 그래도 과학기술의 논리에 지배를 받는 수준이었다. 오늘날 그들은 개소리와 가짜뉴스의 비논리에 지배를 받는 수준으로 무섭게 타락했다. 이 시대 개소리의 만연은 그저 개인적 일탈 현상이 아니다. 인터넷 기술 변화에 약삭빠르게 적응하여 개소리를 주력 상품으로 수익모델화한 이익집단과 이를 콘텐츠로 즐기는 방대한 소비자 집단의 출현과 깊은 관계가 있다. 마르크스식 용어를 쓰자면, 정보의 생산 및 교환양식에 경제적 토대를 둔 정치, 문화적 상부구조적 현상의 성격을 띤다.  

 

객관적 실재와 유리된 삶의 방식이 확산될수록 사태의 진상에 대한 관심은 옅어질 수밖에 없다. 문제는 오늘날 개소리가 만연하는 현상에 기술적 토대를 제공하는 가상세계가 조만간 객관적 실재와 동등한, 아니 그것을 넘어서는 지위를 얻을 것이라는 피할 수 없는 전망이다. 철학자 데이비드 찰머스는 《리얼리티+》에서 가상세계가 진짜 세계 못지않게 실재하는real 것이며, 우리가 머지않은 미래에 현실 세계를 떠나 가상세계에서 인생의 의미를 찾게 될 것이라 전망한다. 그렇다면 객관적 현실이 아닌 가상세계 속에서 사는 인간의 삶에서 사태의 진상이 무엇인지에 대한 관심은 도대체 어떤 형태로 남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