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나는 왜 이런 사람일까' 뿌리를 고민중이라는 친구가 추천해준 책이다.
이 글을 쓰신 저자가 본인의 성장과정에서 부모와 가정에서 받았던 상처를 심리 공부를 하면서 치유해나갔던 경험을 소개함으로써 독자에게도 그러한 성찰을 가져볼 것을 권하는 책이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나는 크게 가정에서 불안하거나 불만이 있거나 억압받거나 부당했다고 생각하는 부분이 없는 것 같다. 항상 나에게 선택권과 결정권을 주고 방목형으로 독립적으로 키워주신 부모님께 감사하다.
그래서 나에게는 크게 와닿거나 깨달음을 주는 책은 아니었지만, 사람에 따라서는 큰 발견을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저자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든 생각은, 부모와 자식 사이란 것도 인간관계이기 때문에 잘 맞고 안 맞고가 있을 수밖에 없는데, 저자의 케이스는 안타깝게도 부모와 자신의 기질이 너무 안 맞았던 것 같다.
기질이 잘 맞는 아이였더라면 부모가 똑같이 키웠어도 크게 트라우마로 남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건 부모가 아이를 낳을 때 정하는 것도 아니고 아이가 태어날 때 스스로 정하는 것도 아니니까, 아이를 키울 때 세심하게 살피고 아이에 맞게 양육을 하는 성숙함이 매우 중요할 것 같다. 그런데 모든 부모가 그게 능숙하게 되는 게 아니니 가정에서 상처를 받는 아이들이 많은 거겠지만..
그리고 이 책을 보면서 부모도 자식에게 질투, 열등감 같은 감정을 느낀다는 것도 알았다. 인간은 복잡한 동물이다. 그것을 들여다보고 인정하는 것도 성찰하는 자만이 가능하다.
사랑과 인내 그리고 용납으로 양육하기보다 체벌, 엄포, 협박으로 우리를 굴복시켰다. 상담학을 공부하고 나서야 그 시절 너무나 무섭고 매서웠던 부모님의 체벌, 엄포, 협박은 겁 많고 소심한 개들이 더 짖고 공격적으로 달려드는 것과 다를 바 없는 미숙한 방어기제라는 것을 알았다. 부모님 내면에 감춰진 불안과 걱정을 해소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나를 혼내고 협박하는 것이었다.
할머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을 닮은 것도 싫어했다. 가장 속상했던 것은 할머니의 차별과 냉대를 누구 하나 말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집에는 나는 절대로 넘지 못하는 벽이 있었고 공부, 외모, 재능 어느 하나 뛰어난 것이 없었기 때문에 '착한 딸'이라도 되어야 했다. '착한 딸'이라는 방패에 몸을 숨긴 나의 열등감은 점점 커져만 갔다. 겉으로는 순한 딸이었지만 냉혹한 차별과 불합리한 갈등을 마주하며 어른과 남자를 향한 분노와 증오가 마음에 차곡차곡 쌓였다. (아이고 할매요..........)
소년범 호통 판사로 유명한 천종호 판사에 따르면 청소년 비행 행동의 주원인은 가난도, 가정의 붕괴도 아닌 양육자와의 애착 손상이라고 한다. 부모와의 애착 형성이 잘 된 아이들은 가난이나 부모의 이혼에도 크게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부모와 함께 살고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어도 부모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는 아이들의 마음은 방황할 수밖에 없다. (한부모가정에 찍는 낙인과 편견 사라졌음 좋겠다. 양쪽 부모가 다 있어도 사랑 없이 애 키우는 집들이 얼마나 많을까.)
SNS는 어떤 면에선 진정한 소통이 아니다. 우리는 SNS를 통해 정보를 공유하고, 재미를 나누고, 내 삶을 과시하고 자랑하지만, 정작 아픔이나 상처는 나누지 않는다. 또한 누군가 내 영역을 침범하고 관여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며, 다른 사람의 고통이나 짐을 알려 하거나 품어주려고 하지 않는다. 이렇게 심리적 단절이 심각한 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에 현대인들의 정신질환이 급증한다는 것이다. (심리적으로 이어질 수 있는 사람들이 곁에 있음에 감사한다.)
안전지대는 물리적으로 안전한 장소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힘들고 지칠 때 쉼을 얻고 차분해질 수 있는 '심리적 공간'을 말합니다. 누군가에겐 자신의 방이나 침대, 바닷가일 수 있고 누군가에겐 부모와 친구와의 대화, 반려동물과 보내는 시간, 산책, 독서, 운동일 수도 있습니다. 즉, 안전지대는 물리적 공간을 초월하는, 본인이 믿고 위로받을 수 있는 모든 공간과 활동, 사람인 것입니다. 여러분의 안전지대는 무엇인가요? 이 질문에 금방 대답할 수 있다면 감정적으로 의지하고 힘을 얻을 수 있는 안전한 곳이 있다는 것입니다.
부모님의 결혼 생활이 불행했던 것도, 내가 무한한 사랑을 받지 못한 것도 나의 부족 때문이 아니라 무한한 사랑을 경험하지 못한 부모님 때문이라는 깨달음이 내 마음에 자유를 주었다.
자존감을 키우고 싶다면 자유와 책임을 경험해야 한다. 그리고 그 경험이 쌓이면 자신이 정말 원하는 것, 잘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이것들이 쌓여 자기 효능감이 발달하고 자기 주도성과 열정이 생기는 것이다. 열정으로 원하는 일을 성취하는 경험이 반복될 때 비로소 자존감이 튼튼해진다. 많은 사람이 주어진 일을 무척 성실히 해내면서도 자존감이 낮은 가장 큰 이유는 자신이 하는 일을 스스로 선택한 경우가 드물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자존감과 자존심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모든 일을 자신의 기준과 시선에서 바라보기 때문에 자신의 생각과 선택이 중요하다. 그리고 나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타인의 평가보다 내적 성공과 성취에 더 관심이 많은 사람이기에 내적 안정감과 자신감이 있다. 이런 여유는 타인을 대할 때도 나타난다. 이들은 타인의 실수나 실패에 대해서도 너그럽다. 그러나 자존심만 높은 사람은 습관적으로 타인과 비교를 한다. 나의 만족보다 타인의 평판과 찬사가 먼저다. 그래서 내가 남보다 뛰어나야만 기분이 좋고 행복하다고 느낀다.
배우자 선택에 있어서 자기 자신에 대한 이해와 객관화가 반드시 필요하다. 자신에 대한 이해가 배우자의 능력과 스펙보다 훨씬 중요하다. 결혼은 내 삶을 누군가와 온전히 공유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도 잘 모르는 채 평생 함께할 누군가를 선택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나는 내 배 속에서 태어난 아이가 하얀 도화지일 것이라 착각했다. 내가 그리고 싶은 대로 마음껏 그릴 수 있을 줄 알았다. 내가 상상하고 바라던 완벽한 딸로 키우고 싶었다. 그러나 아이는 하얀 도화지가 아니었다. 이미 타고난 색깔과 모양이 있었고 그것은 내가 원한 것과 달랐다. 나와 기질이 전혀 다른 딸은 내가 하지 않던 행동을 했고, 내가 원하는 것을 거부했다. 당황스러웠다. 그런 딸아이의 기질을 뜯어고치려 애를 쓸수록 아이와 사이만 더 나빠져갔다.
나이를 먹는다고 다 어른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이를 키우면서 뼈저리게 느꼈다. 나는 어른인 척, 성숙한 척, 옳은 척 흉내 내는 어린아이였다. 진짜 어른은 부모의 체면이나 자존심보다 아이의 마음을 더 헤아릴 줄 아는 사람이다. 그러나 나는 아이가 실수나 실패를 했을 때 아이의 마음을 들여다보기보다는 늘 내 자존심과 체면이 먼저였다.
이런 생활을 반복하며 나 자신에게 '왜?'라는 질문을 수없이 던졌다. 나는 대체 무엇이 그렇게 화가 나고 짜증이 나고 미운 걸까? 길고 긴 고민의 끝에 나는 내 속의 진짜 감정을 찾아냈다. 저 마음 깊은 곳에서 마주한 나의 진짜 마음은 딸아이에게 질투심을 느껴서 화가 나는 것이었다. 내가 딸아이 나이였을 때는 집에서 먼지 같은 존재였는데, 딸아이는 어딜 가나 모든 이의 사랑과 관심을 독차지하는 것이 미웠던 거다.
어린 시절 억압과 통제가 많았던 가정의 아이들은 내면에 억울함과 분노가 쌓여 있다. 그것을 제대로 해소하지 못하면 그 분노는 결국 엉뚱한 곳에서 터진다. 누군가가 나의 내면의 분노와 억울함의 방아쇠를 잡아당기는 순간 그냥 터지는 것이다.
용서는 내가 받은 상처를 상대에게 갚지 않는 마음이자 더 이상 상대에게 휘둘리지 않겠다는 결심이지 상대에게 무한한 자비나 포용을 베푸는 것이 아니다. 용서는 상대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하는 것이다.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에는 복수심, 분노, 우울, 억울함 같은 부정적인 감정이 늘 내재한다. 이것은 마치 스스로 독을 품고 사는 것과 비슷하기에 오래 품을수록 내 삶만 피폐해질 뿐이다.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은 아무렇지 않게 잘사는데 상처받는 사람만 스스로를 괴롭히며 사는 꼴이 되는 것이다. 용서는 내 마음의 평안을 위해 꼭 필요했다.
미리 자신의 기질과 연약함을 잘 알고 관리해야 한다. 그래야 더 오래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다. 이것의 전제 조건이 '자기이해'다. 안타깝게도 자신에 대한 탐구를 하지 않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들은 무작정 자신의 연약한 자아를 보호하려고 하거나 그냥 방치한다. 대신 남들에게 자신이 어떻게 보일지에만 급급해하며 살아간다. 좋은 대학, 좋은 직업, 좋은 배우자 등 화려한 삶으로 그들을 대변하려는 것이다. 남들 만큼 살면 남들 만큼 행복해지리라 믿는 것 같다. 그러나 인격의 성숙과 성장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사적인 것이며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스스로 자신의 내면을 대면할 용기가 없는 사람은 치유도, 회복도 불가능하다.
나는 그 순간 알았다. 갑자기 내 안에서 분노가 폭발한 것은 딸의 잘못 때문이 아니라 딸의 말이 내 안의 상처를 건드렸기 때문이라는 것을.
과거의 영광에 머물러 있지 않고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새로운 것을 배우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어느덧 100세를 넘긴 철학자 김형석 교수도 여전히 배우기에 힘쓴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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