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기록

적당한 실례ㅣ양다솔ㅣ작가도 나도 변화한다

기로기 2024. 9. 15. 22:04

작가의 <가난해지지 않는 마음>을 매우 힘겹게 읽다 포기했었다. 나랑은 정말 안 맞는 작가구나 했다.
그런데 최근 이슬아 작가를 다시 보게 되었기에 양다솔 작가도 그럴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찾아보니 마침 올해 새로 낸 에세이가 바로 이 책이었다.
 
책을 읽어보니 생각보다 나와 공통점이 많은 사람이었고 이전 책보다 훨씬 재미있게 읽었다. 읽길 잘했다.
<가난해지지 않는 마음>은 학교생활에서 느낀 분노가 응축된 글들이라는 걸 이번 책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작가도 나도 변화하는 인간이라는 것을 느낀다. 아니었던 작가가 좋아질 수도 있고, 좋았던 작가가 아니게 될 수도 있다.
 
작가는 술담배를 하지 않고, 비건이고, 옷과 화장을 좋아한다. 엄마를 사랑하는 마음이 느껴진다. 
작가는 스탠드업 코미디언이기도 했다. 
그의 글은 유머감각이 정말 뛰어난데 씁쓸함도 동시에 느껴진다. 
 
작가는 타인에 대해 쓰는 것에 대해 조심하고 검열하는 분위기를 약간은 비판하고 싶은 것 같다. 
그러나 나는 타인을 글에 등장시키는 건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할 일이 맞다고 생각한다. 누군가에게는 원치 않는 박제이기 때문이다.
 
작가의 부모님은 이혼하셨는데 아버지는 출가(스님)하시고 어머니는 친구들이랑 귀향하셨다.
나는 이러한 가정이 많아지는 것이 '가정불화'가 아니라 사회가 좀 더 살기 좋은 곳이 된다는 의미인 것 같다.
 
<가난해지지 않는 마음>은 나의 귀에도 들어왔을 정도로 알려진 책인데, 인세가 1,400만원에도 못 미쳤다니 글만 써서는 먹고 살 수 없다는 말이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라 진짜라는 것을 이젠 알겠다.
 
글쓰기의 고통을 토로하는 글쓰는 사람. 다소 흔한 이 레퍼토리는 이 책에도 존재했다.
 
무척 마음에 들었던 글은 친구와 떠난 정동진 휴가 이야기. 기분이 좋아지는 글이었다. 극단적이 날씨에 대한 우려도 공감되고.
 
데이트하던 남자의 정치성향을 알게 되어 헤어지는 에피소드도 압권이다. 그 남자에게 했다는 질문들을 나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마포구에 사는 작가는 노상방뇨를 한달 간 4번이나 목격했다고 한다. 실화가 아니면 좋겠다 정말.
 
여러 사회문제, '다름'을 이상하게 보는 문화, 가출청소년과 노상방뇨와 고령노동 등을 작가의 시선으로 썼는데 감성으로만 끝나는 듯한 건 아쉽다. 감성으로 안 끝나고 변화로 이어지려면 정치를 하든지 행정을 해야 되지만.
 
에세이를 읽다가 에세이스트들은 정말 용감한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한다. 이렇게 나와 내 주변의 이들을 솔직하게 세상에 꺼내놓는 일을 나는 할 용기가 없다. 
 
계속 쓰는 사람들을 계속 읽어서 글을 통해 이어지고 싶다.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는 끈을 느슨하게라도 쥐고 싶다. 





타인에 대해 쓰는 일은 수난기에 가깝다. 몇 년 전 처음 독립출판물을 출간했을 때 내 생각은 '누가 읽겠어?‘였다. 독립출판물은 일반적인 출판사에서 출간해 공식적으로 서점에서 팔리는 것도 아니고, 내가 사비를 들여 만든 조악한 책 자였으며, 동네 서점 몇 군데에서만 조용히 판매됐기 때문이다. 나는 일기처럼 써왔던 시시콜콜한 개인사를 책으로 엮어 냈고, 그 우스꽝스러운 모양새부터 여러모로 대중의 무관심 속에 조용히 침잠할 거라 예상했다.

특별히 누군가를 모욕할 의도 없이도, 오히려 사랑하는 마음으로 쓴 글에서도 누군가는 상처를 받았다. 친구에게 바치다시피 한 글을 쓰고 나서도 절교에 가까운 통지를 받았다. 선뜻 자신에 대해 쓰라고 마음을 내주었던 친구도 막상 글을 보고 나면 표정이 바뀌었다. 나 또한 그 표정을 알았다.
누군가의 글에 등장하는 것은 생각보다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나 또한 주변인들의 글에 수없이 등장했다. 글 속에서 나는 아무렇게나 납작해지고 편협해졌으며, 이상한 모습으로 왜곡됐다. 나조차 깨닫지 못했던 본질이 포착되는 장면이 드물게 있긴 했다. 그런데 글의 어디에도 진짜 나는 없었다. 그들은 나를 담아내는 데 보기 좋게 실패하고 있었다. 나는 글에 대한 감흥보다는 그저 동료 창작자로서 그가 세상의 많은 피조물 중에 하필 나를 골라서 지난한 쓰기의 시간을 견뎠을 것에 대해 생각할 뿐이었다.

어릴 적부터 어디서나 눈에 나는 행동을 했던 나는 가는 곳마다 ‘왜’가 따라붙었다. 왜 학교에 안 가? 왜 그렇게 입고 다녀? 왜 그렇게 말해? 내 일거수일투족에 대한 질문이 살아졌다. 예의가 없고 개념이 없고 눈에 난다고, 낙인찍혔다. 어디를 가나 시간이 지나면 무리에서 배척당했고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았다. 뜨거운 관심과 분노로부터 비롯된 그것은 질문처럼 보이는 비난에 가까울 때가 많았다. 사람들과 비슷하게 행동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였다. 한국에 살면서 질문을 받는다는 것은 다르다는 증거였다. 안타깝게도 세상에는 가만히 있어도 나를 이해해주는 존재가 별로 없었다.
나는 침묵하는 방법을 몰랐기에 그 질문에 대답하려고 애썼다. 늘 설명했다. 때로 답을 원하고 한 질문이 아닐 텐데도 그랬다. 답하기 위해서는 생각해야만 했다. 나는 왜 이렇게 말할까, 나는 왜 이렇게 입을까, 나는 왜 이렇게 행동할까. 말하다 보니 나도 내가 왜 그런지 알고 싶었다. 나의 첫 책 《가난해지지 않는 마음》은 그런 질문으로 시작된 글들이 대부분이다. 공격과 같은 수많은 질문에 대답하는 과정에서 나는 그들에게 경도되기보단 더욱 구체적으로 내가 되었 다. 나와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 다른 삶을 살아온 사람과 충돌하는 일이 나를 새롭게 보게 만들었다. 나를 설명할 수 있는 언어를 적립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