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기록

기억, 서사ㅣ오카 마리ㅣ타인의 고통 앞에서

기로기 2024. 8. 29. 23:16

도서관 신간 코너에서 독특한 표지에 이끌려 읽은 책이다. 예전에 나온 책인데 이번에 재출간된 것 같았다. 재출간이 아니었다면 만나지 못했을 책이었을 것 같아서 출판사의 역할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었다. 책에 대한 사전정보가 없었기에 생각보다 굉장히 무거운 주제라 놀랐다. 타인의 고통, 그것도 아주 큰 고통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에 대해 고민하게 하는 책이다. 

 

저자는 일본인인데 한국의 위안부 여성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분쟁 역사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내가 얼마나 영미권 외의 역사에 무지한지 다시 한 번 느꼈다. 공부가 필요하다.

 

 

32)다시 말해 말해지지 않은 것-말할 수 없는 것-은 사건으로서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말이라는 것이 무엇보다도 그렇게 만능인 것일까. 무슨 일인가를 말하려 할 때-그리고 그것이 무언가 근원적인 경험일수록- 우리가 먼저 느낄 수밖에 없는 사실은 오히려 언어가 완벽하게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일 것이다. 그것이 어떤 사건인지 자기 자신도 잘 이해할 수 없는 경험을 기성의 언어, 기성의 말로 잘라낼 때 무언가 어색하다고 생각한 적 없었는가.

사건이 우리가 가진 말의 윤곽에 꿰맞추어져 잘려나갈 때 우리는 말로 이야기된 사건이 사건 자체보다도 어딘가 축소되어버린 듯하고 어딘가 어긋난 듯한 느낌을 받은 적 없었는가. 우리가 가진 언어의 윤곽 속에 완전히 담기지 않은 채 넘쳐흐르는 사건의 조각-말해지지 않은 사건의 잉여 부분-이 잘려나간 부분에 많이 있는 것은 아닐까.

대부분의 사건에는 시간의 흐름과 함께 바로 그때 말할 수 없었고 또한 말로는 잘라낼 수 없었던 잉여 부분-사건의 조각-이 틀림없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것은 시간 경과와 함께 그 사건을 경험한 당사자조차도 잊어버려 마치 말로 이야기된 것이 사건의 전체인 양 생각되는 경우가 많다. 사건을 언어화하는 일-그때 사건은 항상 과거형으로 표현된다-은 사람이 사건을 '과거'로 길들이는 것은 아닐까. '과거'의 것으로 길들여진 사건은 우리의 기억 속에서 안정된 은거지를 발견할 것이다. 과거형으로 언어화된 사건이야말로 일반적으로 '경험'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일지도 모른다. 사람이 주체가 되어 참조하는 기억이란 틀림없이 그와 같다.
 

70) 살아남는다는 것이 폭력일 수밖에 없다는 자체가 폭력적인 그 '사건'의 기억을 우리는 어떻게 공유할 수 있는가. 그러나 인간이 살아남는다는 것에 내재하는 폭력성이라는 문제를 접하면서 작품은 결국 막스와 호르스트라는 두 피수용자의 '진실한 사랑' 이야기로 손쉽게 환원되어버리고 만다. 절멸수용소라는 극한 상황에서조차 인간은 그만큼 숭고할 수 있었고 아무리 잔인한 폭력도 인간의 정신적 존엄까지 빼앗지 못한다는 서사를 필요로 하는 사람은 누구일까. 그것은 절멸수용소를 직접 경험한 적 없었던 사람들, '사건' 외부에 살고 있는 사람들, 말하자면 우리가 이 세계의 일상을 안심하며 살아가기 위해 필요로 하는 서사가 아니었을까. '사건' 내부에서 일어났지만 우리는 알 수 없는 상상을 초월한 폭력이 '사건' 외부, 즉
우리 세계에 침입해오지 못하게 하고 불안에 떨지 않게 하려고 우리는 우리의 서사와 우리의 판타지를 그것에 투영한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사건'의 기억을 공유하고 그것을 우리의 기억으로 만들기 위해 이야기되는 서사가 아니다. 어디까지나 그 '사건'은 철조망 속의 사건으로서 그 주위를 둘러싸고 우리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건이라며 안심하기 위해 만든 서사가 아닐까.

 

76) 베텔하임이 '홀로코스트'라는 명칭으로 이 사건을 부르는 데 이의를 제기했던 것은 절멸수용소에서 학살된 유대인은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불합리하게 죽임을 당한 것이어서 그들의 죽음에는 어떤 종교적인 의미도 없었기 때문이다-그들 중에는 세속화되어 유대교와는 관련 없는 생활을 하고 있었던, 유럽 사회에 동화된 유대인도 많이 있었다. 그것을 '홀로코스트'라는 원래 종교적 함의를 띠는 낱말로 부르는 것은 이들 유대인의 죽음에 거짓된 종교적 신성성을 부여하고, 그럼으로써 그들로부터 그들이 무의미하게 죽었다는 '진실'에 직면하는 최후의 존엄성마저 빼앗아버리는 행위이기 때문에 그는 '홀로코스트'라는 명칭의 사용을 반대했다고 말했다. 베텔하임은 인간이 이해 가능한 의미 세계 속에 위치시킬 수 없는 '사건'의 폭력과 직면하는 것이야말로 부조리한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에게 남겨진 인간으로서의 마지막 존엄성이라고 말한다. 절멸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사람의 대다수는 자신만 살아남았다는 경험, 바로 그것의 폭력적인 자의성을 심적 외상으로 갖고 있다. (이 설명을 들으니 이의가 타당하다는 생각이 든다. 현대에도 어떤 사건을 사건 그대로 보지 않고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경우가 숱하게 많다.)  

그런 심적 외상을 겪는 한 생존 여성이 어느 날 베텔하임에게 편지를 보내왔다. 그녀는 자신이 살아남은 것은 수용소에서 죽임을 당한 사람들을 대신하여 자기 자신에게 남겨진 삶을 더욱 바람직하게 살아야 할 사명을 부여받았기 때문이라고 자꾸만 생각된다고 편지에 썼다. 그 여성의 말에 대해 베텔하임은 자신의 저서에서 그런 사고방식을 부정한다. 그는 그와 같은 사명 따위란 없다고 말한다. 살아남은 사람이 사명을 부여받았기 때문에 살아남은 것이라고 한다면 죽은 사람들은 그와 같은 사명이 없었기 때문에 죽은 것이 되며, 따라서 그들은 죽어야 할 이유가 있었기에 죽은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는 죽은 것은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며 살아남은 것은 그들이 아니라 나이므로 살아남은 것에는 어떤 이유나 사명도 있을 수 없다고 말한다. 그처럼 자신이 살아남게 되었다는 사건의 폭력을 자기 자신에게 합리화함으로써 간신히 삶을 지탱해나갈 수 있는 것도 베텔하임이 보기에는 배척되어야만 하는 자기기만이었다. 나는 그 윤리적 명령의 엄숙함에 멈칫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사건의 폭력에서 살아남았기 때문에 그와 같은 방편으로써 자신을 납득시킬 수밖에 없는 사람에게 그것은 자기기만일 뿐이며 '진실'에 직면하라고 말하는 것이 지닌 또다른 하나의 폭력성에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우리는 상상을 초월하는 대량학살이라는 '사건'을 가능하게 만들었던 눈속임, 그 기만이 내포한 범죄성을 비판해야만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자기 자신에게 행하는 기만도 거부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윤리적 사명을 띠고 있는 것이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사건의 폭력에서 살아남기 위해 행한 것일지라도, 사건의 폭력에 거짓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그와 같은 부조리를 낳은 폭력의 근원도 기만 속에 계속 소생하게 된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