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기록

도서관에는 사람이 없는 편이 좋다ㅣ우치다 다쓰루ㅣ도서관, 책, 작가에 대한 생각

기로기 2024. 8. 23. 16:15

도서관, 책, 작가에 대해 본인만의 철학이 있으신 분이다. 일본에 사는 70대 할아버지다.

비과학적이고 종교적인 세계관이라도 할 수 있는데 독특해서 재밌고 묘하게 설득력이 있다. 

과학적 사고관을 중시하는 친구는 어떻게 읽었을지 정말 궁금하다.

이 책에서 무라카미 하루키 언급을 해서 이후에 하루키 책도 읽었다.

나도 더 정진해서 나의 철학, 세계관을 계속 발전시켜 나가고 싶다. 



63)평생을 읽어도 읽을 수 없을 만큼이나 있구나. 저는 그것을 통감하게 하는 것이 도서관 최대의 교육적 기능이라고 생각합니다. 도서관의 사명은 무지의 가시화입니다. 자신이 얼마큼 무지한가를 깨닫는 것. 지금도 무지하고 죽을 때까지 공부해도 아마 무지한 채로 끝나리라는 사실 말이죠. 자신의 그 가공할 만한 무지 앞에서 전율하는 것이 도서관에서 경험하는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그래서 모든 영화에서 도서관은 '무지의 앎'의 공간으로서 표상되죠.

67) 전통 예능을 수련하는 것에는 꽤 돈이 들어서 젊은 직장인은 하기 어렵지요. 옛날 같으면 부장님 정도 는 되어야 수업료를 낼 수 있습니다. 어떤 지위에 오르면 수련을 하는 것이 의무에 가까웠습니다. 수련을 하다 보면 선생님에게 꾸중을 듣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요. 초보자 때는 물론이고 10년을 해 도 20년을 해도 여전히 혼이 납니다. 어제도 능악 수련 을 하다가 선생님에게 막 혼이 났습니다. 저도 이제 칠순이 지났고 이 세상과 이별할 나이가 가까워졌는데 제게 “노력이 부족하다”고 하더라고요. 너무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이제 저에게는 노력할 수 있는 체력도 남아 있지 않은데 일흔둘의 저를 여든의 선생님이 계속 꾸짖는 것입니다. 선생님에게 혼나는 지점은 모두 '자못 저다운 실수‘ 입니다. 저라는 인간의 본성이 그대로 드러난 실패거든요. 그냥 어설프다든가 기억력이 나쁘다든가 하는 게 아 닙니다. 저의 실패에서 드러나는 것은 세상을 얕보는 태 도 같은 것입니다. 바로 저의 인간적 결함이 드러나는 거죠. 선생님은 거기에 초점을 맞추어서 혼을 냅니다. … "장난치지 마라. 이만큼 수련을 해 놓고 아직도 그런 바보 같은 소리를 해”라고 혼났습니다. 그때 수련하는 것이란 '혼나려고 돈을 내는 구조'라고 생각했습니다. (여든의 선생님이 일흔둘의 제자를 혼내고 일흔둘 제자는 꼼짝없이 혼나는 모습이 상상되어 재밌었다.)

97) 학교는 여하튼 여러 선생님이 다양한 가치관과 잣대를 가진 편이 좋습니다. 가치를 재는 척도가 다른 이들이 많은 가운데서 자라야 아이는 성숙할 수 있습니다. 모두가 똑같은 가치관의 울타리 속에서 아이는 호흡하기 힘들고, 그런 사회에서는 살 수도 성숙할 수도 없습니다. 그럼 학교에 가지 않게 되고요. 학교 안에 아이들의 피난처가 필요합니다. (토드 로즈가 읽으면 아주 좋아할 것 같은 대목. 현명한 사람들은 획일성이 얼마나 무섭고 다양성이 얼마나 귀중한지를 잘 아는 것 같다.)

101) 여기에 넣을 것(용기)이 있어서 그 안에 이것저것 콘텐츠를 채우는 것이 아닌 거죠. 새로운 입력이 있을 때마다 용기 자체가 다른 것으로 바뀌어 가는 것이 배움입니다. 즉 배운다는 것은 다른 사람이 되는 겁니다. 학교 교육은 아이들이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을 지원하는 일이죠. 무지에 만족하고 무지에 주저앉아 있는 아이들을 ‘자기 쇄신'의 프로세스로 이끄는 것이 교사의 일입니다. ‘주저앉는 것'이 '무지'입니다. 이 무지에 고착된 아이들을 해제하는 것은 꽤 어렵습니다. 아이들이 무지에 안주하는 이유는 실은 자기방어 때문입니다. 자기 쇄신이란 자신이 가진 틀을 손에서 놓는 일입니다. 자신의 신념 체계를 부수고 무방비하게 열린 상태가 되는 거죠. 연속적인 자기 쇄신이란 매우 리스크가 높은 일입 니다. 배우기 위해서 자기방어를 해제하는 일이니까요.

124) 책장은 인간관계를 맺는 데 유익한 정보를 제공하기도 합니다. 사람을 사귈 때 알아야 할 것은 그가 '실은 어떤 존재인가‘ 보다 오히려 ‘다른 사람에게 어떤 존재로 여겨지고 싶어 하는가’로 정해지기 때문입니다. (통찰력...! 생각해보면 나도 내가 되고 싶은 존재가 되기 위한 책을 읽는 것 같다.)

 

135) 책이란 외부로 통하는 문입니다. 책은 독자를 '지금이 아닌 시대'와 '여기가 아닌 장소'로 데려가는 힘을 지녔습니다. 그래서 책 한 권이 거기에 있는 것만으로도 닫힌 공간에 자그마한 구멍이 생기고 그로부터 신선한 바람이 불어 들어옵니다. 그 바람 냄새를 맡은 사람들이 책 주위로 모여듭니다. 이것이 21세기 코뮌 부활의 계기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외부로 통하는 문이 열린 장소에는 독특한 활기가 있습니다. 아는 사람은 알지요.

180) ‘가능한 한 많은 사람이 작품을 통해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것'과 '가능한 한 오랜 기간 작가의 권리를 보호하 는 것, 어느 쪽을 우선해야 하는지 ’정답'은 존재하지 않 습니다. 그러나 '정답'이 없는 곤란한 문제를 깊이 생각 하는 일은 종종 ‘정답'에 다다르는 것 이상의 지적 이익을 우리에게 가져다줍니다.

189) 도서관에 신간을 넣는 것에 반대하는 사람은 ‘자신의 책을 읽는 사람'보다 '자신의 책을 사는 사람'에게 관심이 있다고 봅니다. 그러니 '무료로 자신의 책을 읽는 사람'이 자신의 고유한 재물을 훔치는 듯 보이는 거죠.
그 생각은 제게 꽤 도착적인 생각으로 느껴집니다. 만약 그 논리를 허용하면 ’읽고 싶다(그런데 돈을 지불할 수 없다)'는 사람보다 '돈을 지불한다(그런데 읽을 마음은 없다)'는 사람을 우선으로 배려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논리를 인정하면 "당신이 저작권을 가진 책을 전부 정가로 사들여서 폐기하고 싶다(아무도 읽게 하고 싶지 않으니까)"라는 요구를 받으면 거절할 논리가 없어집니다. 이러한 제안을 물리치려면 '책을 사는 사람'이 아니 라 '책을 읽는 사람'을 위해서 책을 쓴다고 바로 그 자리 에서 단언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제안을 앞에 두고 잠시라도 주저하는 사람은 글을 쓸 자격이 없습니다. 적어도 저는 그런 사람을 작가라고 인정하지 않을 겁니다. 책을 쓰는 일이란 그 본질이 '증여'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독자에 대한 선물'이라고 말이죠. 그리고 모든 선물이 그렇듯 그것을 받아들고 "고맙다"고 말하는 사람이 나올 때까지 그것에 얼만큼의 가치가 있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 책을 자신이 받은 '선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나타나 "고맙다"는 말을 입에 담을 때에야 비로소 그 작품에 '가치'가 내재되어 있었다는 이야기가 성립됩니다. (글로 돈을 벌지 못하면 생계를 잇지 못하는 전업 작가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저자 본인도 자신의 이러한 논리에 대한 반박을 알고 있는 듯했다. 어려운 문제다. 글만 써서 생계를 이어갈 생각을 하면 안 되는 걸까?)

192) 중국처럼 해적판이 횡행하는 나라와 미국처럼 저작권이 주식처럼 거래되는 나라는 저작 권 문제에서 정반대인 듯 보이지만, 원저작자에 대해 순수한 감사를 잊고 있는 점에서는 꼭 닮았습니다.
저작물은 ‘작가가 독자에게 건네는 선물'입니다. 그래서 선물을 받아 든 쪽은 그것이 가져다준 은혜에 경의와 감사를 표합니다. 저는 인세란 창작자에 대한 경의가 마침 화폐의 형태를 빌려 제시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훌륭한 작품을 만들어 독자에게 즐거움을 가져다준 공적에 대해 독자는 고맙다고 말하고 싶은 마음이 들 겁니다. 그 말을 하지 않으면 왠지 찝찝한 기분이 들죠. 이 마음은 일단은 화폐 형태를 띠고 창작자에게 어느 정도 돌아갑니다. (세상에 그런 사람, 찝찝함을 느끼는 사람만 있다면 참 좋겠지만 현실은 아닌 것 같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