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출판으로 한창 이름을 날리던 때 수필로 접했던 이슬아 작가는 나에게 너무나 멀게 느껴지는 사람이었다. 그 글에 빠져들지 못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추천으로 이슬아의 첫 소설 <가녀장의 시대>를 읽게 되었는데 밝고 무해하면서도 뜻이 있는 글이었다. 그렇게 좋은 감정을 느낀 후에 어디선가 누군가가, 자신의 2023년 올해의 책이 이슬아의 수필이라고 소개하는 것을 봤다. 그래서 어쩌면 내가 이슬아 작가의 진면목을 모르고 있는 건 아닌가 하여 다시 수필을 찾아보게 되었다. 가장 최근에 낸 <끝내주는 인생>이었다.
나와는 굉장히 멀리 있는 사람이라 생각했던 과거와 달리, 이번 책을 읽으면서 나와 비슷한 점을 많이 발견했다. (그래서 양다솔의 책도 다시 읽게 되었고 역시 읽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이슬아는 스스로 말하듯 살아가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 그래서 글에 자기긍정, 희망, 유머, 글쓰기에 대한 애정 등 밝음과 따뜻함과 무해함이 묻어났다. 유년시절 젊은 부모님과의 추억, 모든 게 유일해서 최고가 되는 작은 동네, 소중하고 개성있는 친구들 등 글은 소소하고 일상적이고 어렵지 않다.
이슬아 작가가 결혼했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이번 책을 보며 왠지 이 책에 실린 사진을 찍은 작가가 남편분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정말이었다. 이 책에는 결혼을 결심하기까지의 마음이나 결혼 이후의 이야기가 없는데 다음 책에선 아마 읽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된다.
이슬아와 처음 둘이 밥을 먹을 때, 아직 책을 내지 않았으나 글을 너무 잘 쓴다는 계미현(찾아보니 그 후 웹시집을 발간하셨다!)이 식순을 준비해오고 책을 선물했다는 대목이 기억에 남는다. 나도 정말 좋아하는 친구를 만날 때 큐시트를 써가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계미현이 선물했다는 <아름다움과 정의로움에 대하여>를 곧장 읽어보았으나 내겐 너무나도 어려운 책이었다.
이렇게 꾸준히 사랑받고 책을 내는 이슬아도 전업작가로서의 지속가능성을 걱정하다니...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 시대를 살아가는 누구에게나 지속가능한 돈벌이는 문제 중의 문제다. 그럼에도 먹고 싶은 것 먹고, 하고 싶은 것 하면서 살아갈 수 있음에 감사하다.
176)모든 요가원이 그러하듯 이곳에도 약간의 자리싸움이 있다. 젊은이들이 많은 요가원에서는 서로 앞줄에 앉기 위해 매트로 자리를 찜해놓는다. 하지만 이곳 여자들은 서로 뒷줄에 앉으려고 난리다. 거울로부터 먼 자리 말이다.
206)"주간지에 보낼 원고를 마감하는데 아무래도 쓰레기를 쓰고 있는 것 같아." 나는 이야기를 쭉 듣고선 대답한다. 쓰레기를 쓰레기라고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자기 객관화된 안목에 감사하자. 그걸 알아봤으니 다음에는 더 좋은 원고를 쓸 수 있고 얼마나 좋으냐. 출퇴근하지 않고 집에서 일할 수 있음에 감사하자. 글값으로 십오만 원을 벌 수 있음에 감사하자. 부족한 우리에게 청탁서를 보낸 주간지에 감사하자. 그리고 마지막으로... 지면이 주어진 것에 감사하자고 말할 때쯤 친구는 진절머리를 내며 전화를 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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