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기록

수확자ㅣ닐 셔스터먼ㅣ인간이 죽지 않는 시대 인간을 죽여야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기로기 2024. 8. 14. 23:11

<역노화>를 읽고 친구와 얘기를 나눌 때 친구가 추천해준 SF 소설이다. 더 이상 인간이 늙거나 병들어 죽지 않는 세상, 사고를 당해도 치유기계에서 살려내는 세상을 배경으로 한다. '수확자'라는 제목은 이러한 세상에서 인간을 죽일 수 있는 예외적인 자격을 갖추고 경외의 대상이 되는 초엘리트 계급을 일컫는다. 인간의 목숨을 거두어들인다는 의미에서 수확자인 것이다. 지금 우리의 기준으로 보면 수확자란 그저 연쇄살인마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소설의 배경인 시대의 기준에서는 모든 사회구성원이 합의한 존재이자 막강한 권력자이기도 하다. 수확을 대하는 자세는 수확자마다 다르다. 거기에서 갈등이 생겨난다. 

 

컨셉을 듣고 정말 흥미롭다고 생각했지만 동시에 어렵고 철학적인 소설일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굉장히 쉽고 상업적이었다. 그러면서 성찰적인 질문도 놓치지 않는다. 필력이 굉장하다. 역시 이미 헐리웃에서 영상화 진행중이라고 한다. 영화로 만들어지면 꼭 봐야겠다. 소설은 다른 제목으로 2편과 3편까지 있다. 

 

인간이 죽지 않는 세상에서도 인간은 고민하고 고통받는 존재다. 삶이 유한한 인간으로 산다는 건 뭘까, 삶이 무한한 인간으로 사는 것은 무엇이 다를까. 소설을 읽으면서 아이러니를 느꼈다. 

 

그리고 내가 들었던 의문은, 이 사회에서는 각종 중독 문제가 하나도 없을까 하는 것이었다. 만약 심각한 마약이나 알코올 중독자라 해도 치유기계에 들어갔다 나오면 생명은 지장이 없으나 중독 문제는 고쳐지지 않는 건가?

 

 

간략 줄거리 (스포주의)

주인공 시트라, 로언 둘 중 하나는 죽어야 한다.

패러데이가 죽는다. 자살일까 타살일까.

시트라가 패러데이를 죽인 용의자로 누명 쓴다.

썬더헤더가 도와준다.

퀴리는 패러데이의 수습생이었고 훗날 둘은 연인으로 발전했었다.

패러데이는 죽지 않고 살아있었다.

로언이 고더드 무리를 다 죽인다.

사랑하는 사람을 수확해야 수확자가 될 수 있다.

시트라가 묘책으로 로언을 살린다. 

 

 

이런 말이 있다. <죽음은 전 세계를 동족으로 만든다.> 그렇다면 죽음이 없는 세계에서는 모두가 이방인이 되는 걸까, 하고 로언은 생각했다.

로언은 이미 수확자가 된다는 것이, 나머지 세상에서 동떨어진 취급을 받는다는 것이 어떤 일인지 알았다.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영원히 그런 삶을 견뎌낼 수 있을까? 그러지 않아도 될지 몰랐다. 수확자들은 함께하니까, 그렇지 않은가? 1년에 세 번 콘클라베가 열리기도 하고, 분명히 서로 친구가 되기도 할 것이다. 세상에서 제일가는 엘리트 클럽이었다. 아니, 그런 엘리트 클럽에 속하고 싶은 건 아니었지만 끌리기도 했다. 수확자가 된다는 건 무거운 짐일 테지만, 엄청난 영예이기도 했다.

선더헤드에게 권위가 넘어가지 않은 조직은 단 하나뿐이었다. 수확령. 인구 성장을 조절하기 위해 사람들이 죽어야 한다는 결정이 내려졌을 때, 이것만큼은 인간의 책임이어야 한다는 결정도 내려졌다. 다리를 고치고 도시를 계획하는 일은 선더헤드에게 넘겨줄 수 있어도, 생명을 빼앗는 것은 양심과 의식을 가지고 해야 할 행동이었다. 선더헤드에게 양심이나 의식이 있는지 여부는 증명할 수 없었기에 수확령이 탄생했다. (AI는 양심도 의식도 없다고 봐야 할까? 인간이라면 양심과 의식이 모두 있나?)

권력에는 우리에게 남은 유일한 질병, 즉 인간 본성이라고 불리는 바이러스가 침투하기 때문이다. 나는 무엇보다도 수확자들이 자기 일을 좋아하게 될까 봐 걱정이다.

나는 종교에 대해, 그리고 우리가 스스로의 구원자가 되면서 어떻게 신들과 대부분의 신앙이 무의미해졌는지에 대해 생각한다. 자신을 넘어서는 거대한 뭔가를 믿는다는 건 어떤 기분이었을까? 불완전함을 받아들이고 우리가 영영 이루지 못할 높은 환상을 올려다보는 기분은? 분명히 위로가 되었을 것이다. 무서웠을 것이다. 사람들을 속세에서 벗어나게 해주고, 동시에 온갖 악을 정당화했을 것이다. 신앙의 눈부신 혜택이 과연 신앙을 악용했을 때 부를 수 있는 어둠보다 컸을까 하는 부분은 자주 생각한다.

<절대 인간성을 잃지 마라.> 수확자 패러데이는 예전에 그렇게 말했다. <그걸 잃으면 넌 살해 기계에 지나지 않게 된다.> 패러데이는 <수확> 이라고 하지 않고 <살해> 라고 했다. 로언도 당시에는 별생각이 없었지만 이제는 이해했다. 그 행위에 무감각해지는 순간, 그것은 수확이 아니게 되었다.

<인간은 천성적으로 포식자야.> 고더드가 운을 뗐다. <문명이라는 살균력 때문에 표백이 됐을지는 몰라도, 본성을 완전히 제거할 수는 없어. 그 점을 받아들여라, 로언. 그 변화의 힘을 가진 가슴에 달라붙어 젖을 빨란 말이야. 넌 수확이 후천적인 기호라고 생각하겠지만, 그렇지가 않아. 사냥의 흥분과 살해의 기쁨은 우리 모두의 내부에서 들끓고 있다. 그걸 터뜨리면 너도 이 세상이 필요로 하는 부류의 수확자가 될 거다.>

고더드는 제자들에게 양심을 포기하기만 하면 인간이 누구나 열망할 수 있는 대가를 약속했으니 말이다. 양심이 마음의 부담이 되는 직업군에서 누가 양심을 원하겠는가?

회춘을 하면 정말로 젊어지는 걸까? 우리는 똑같은 기억, 똑같은 습관, 똑같은 이루지 못한 꿈에 매달린다. 몸뚱이는 기운차고 유연해졌을지 모르지만, 어떤 목적을 위해서란 말인가? 목적이 없다. 끝도 없다. 나는 죽을 운명이었던 사람들이 목적을 위해 더 분투했다고 믿는다. 그들은 시간이 아주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우리는? 우리는 죽을 운명이었던 이들보다 훨씬 효과적으로 모든 것을 미룰 수 있다. 죽음은 모두에게 적용되는 법칙이 아니라 예외가 되어 버렸기에. 내가 매일매일 열심히 거두고 다니는 침체는 유행병처럼 번지기만 한다. 가끔은 내가 살아 있는 시체들이라는 구식 종말에 맞서서 지는 싸움을 하고 있는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