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기록

구의 증명ㅣ최진영ㅣ이런 사랑 하고 싶은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기로기 2024. 7. 13. 00:17

작년에 서점을 비롯해서 여기저기서 많이 보이고 언급이 되길래 궁금했던 소설이다.

잠들기 전 읽고 있던 책이 머리에 잘 안 들어와서, 소설이 읽고 싶어져서 밀리의 서재에서 읽었다.

'내 서재'에 아주 오랫동안 담겨 있었던 <구의 증명>을 드디어.

책 읽는 속도가 느린 편인데도 짧고 복잡하지 않은 설정이라 2시간 만에 읽을 수 있었다.

 

절절한 사랑 이야기라는 정도의 배경지식만 있었기 때문에 인육 설정이 있는 줄 몰랐다.

자연히 영화 <본즈앤올>이 떠올랐다. (나중에 찾아보니 두 작품을 함께 리뷰하신 분들도 꽤 있었다.)

그리고 둘의 성별이 처음에는 명확히 나오지 않아서 둘 다 남자 아이인가, 싶어서 영화 <괴물>도 떠올랐다.

하지만 소설이 진행됨에 따라 '담'은 여자고 '구'는 남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릴 때부터 이어진 두 남녀의 비극적인 사랑이라는 점에서 <백야행>도 생각났다.

그리고 이 소설의 '남들이 뭐라든, 사회의 기준이 어떴든, 절대적으로 나를 사랑했으면 하는' 마음이 <나의 해방일지>의 '추앙'도 떠오르게 했다. 

 

'난 너고, 넌 나야' 라는 말이 생각나는 사랑 이야기다. 서로에게 서로 뿐인. 너를 마치 나처럼 생각해서 뗄래야 뗄 수 없는.

하지만 나에게 더 와닿은 코드는 그런 단 하나의 사랑보다도, 인간 사회에서 당연한 것과 당연하지 않은 것의 기준에 대한 의문이었다.

예를 들면 인간이 인간을 먹는 행위는 문명 사회에서 완전히 금기시되고, 이유를 막론하고 역겹고 충격적이라는 발상이 자연스럽다.

그런데 인간이 다른 인간이 인간답게 살지 못하게 하는, 사실상 그리고 실제로도 죽음으로 내모는 행위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회에 대한 비판이 느껴졌다.

(책에서 제기하는 문제는 아니지만 인본주의의 가치 하에 인간중심적으로 모든 것을 결정하고 동물들을 부리는 행위도.)

왜 이건 안 되면서, 진짜 안 되어야 할 일은 버젓이 행해지는 거야? 라는 온당한 의문.

'담'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내가 '구'의 시체를 먹는 건 당연히 해선 안 될 짓이고, 아무 죄 없는 '구'가 빚더미에 올라 평생을 노예처럼 살거나 쫓겨야 하는 건 당연한 거야? 느낄 수 있지 않나. 

내가 사회에 호기심과 의문이 많아서 그럴지도 모르지만 나에겐 이 코드가 더 진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도입 부분의 '담'의 생각들이 인상적이었다. 

 

게다가 나는 아무리 사랑해도 결국 나는 나고, 너는 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아무리 사랑해도 본인 육체에 담겨 살아가는 인간에게 어쩔 수 없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하니까.

그런 생각에 대해서 이 소설은 그 한계를 깨부수고 넘어서려는 사랑을 말하고 싶었던 걸까..?

 

'담'의 곁에서 보호자로서 평생을 일하다 생을 마감한 이모의 삶과, '구'와 연인으로 지냈던 누나의 삶도 그들을 화자로 놓고 새로운 소설이 나올 수 있을 것 같다. 

이모의 말 중에 좋았던 것 : "이모는 이렇게 대답했다. 무언가를 알기 위해서 대답이나 설명보다 시간이 필요한 경우도 있다고. 더 살다보면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데 지금 이해할 수 없다고 묻고 또 물어봤자 이해하지 못할 거라고. 모르는 건 죄가 아닌데 기다리지 못하는 건 죄가 되기도 한다고."

누나의 말 중에 좋았던 건, 남녀가 만나는데 타이밍 말고 뭐가 더 있냐고 했던 말. 

 

그래서 내게 이런 사랑을 하고 싶냐고 누가 물어본다면 뭐라 대답할까 어젯밤에 생각해봤는데,

아니.. 전혀 하고 싶지 않아.. 라는 게 내 대답이 될 것 같다.

지금의 내가 생각하기에 찐사랑이라면 '구'와 '담'은 진작 서로가 각자의 길을 갔어야 좋았다고 생각한다.

소설에서도 '구'가 '담'을 위해 밀어내려고 한다. 하지만 '담'은 '구'를 놓지 않았다.

이런 사랑을 하는 사람이 '아직' 이 세상 어딘가에 있겠지? 그저 행복하길 바랄 뿐이다.

아니, 소설에 나오는 말처럼 불행해도 함께라서 괜찮길 바란다.

 

소설을 읽고 나서 찾아보다가 알게 된 것은 이 소설이 2022년이나 2023년에 출간된 신간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특별히 마케팅을 한 것도 아니고, 유명인의 샤라웃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8년 만에 역주행을 했다니..

분명 이 소설의 무언가가 지금의 독자층을 사로잡았다는 얘기인데.

지금도 많이 읽히는 또 다른 옛날 소설 양귀자의 <모순>에 비하면 그 포인트가 정확히 내게 와닿진 않았지만,

짧은 분량과 단순한 설정과 인터넷 소설 같은 감성과 짙은 비극성과 있어보이는 제목까지 모든 게 다 일조했을 거라 생각한다.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의 인기와 이 소설의 역주행을 연결짓는 분들도 계신데 일리있다는 생각이 든다. 심지어 주인공이 '구'..!

인터넷 소설 같은 감성이라 함은, 이 소설이 막장이라거나 유치하다는 의미는 아니고, 몇몇 장면에서 그런 감성을 느꼈다는 뜻이다.

예를 들면, '구'가 공장에서 같이 일하는 누나가 등장하는 장면부터 나는 둘에게 무슨 일이 벌어질 건지 예상됐는데 정말 그렇게 흘러갔고, '담'이 그런 '구'와 누나를 보고 상처받는 장면, '구'가 호스트바 일까지 하게 되는 것 등 클리셰라고도 정석이라고도 할 법한 장면들이 있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읽은 소설이었고 나의 취향저격은 아니었지만 역시 소설은 소설만의 매력이 있다.

그리고 소설을 읽을 땐 고딕 계열보단 바탕 계열의 폰트가 어울린다.

 

 

아래는 좋았던 구절.

 

아이는 물건에도 인격을 부여하지만 어른은 인간도 물건 취급한다. 아이에서 어른으로 무럭무럭 자라면서 우리는 이 세계를 유지시키고 있다. 사람은 돈으로 사고팔 수 있다. 사람은 뭐든 죽일 수 있고 먹을 수 있다. 사람은 거짓말을 하고 사기를 친다. 누군가의 인생을 망치고 작살낼 수 있다. 그리고 구원할 수도 있다. 사람은 신을 믿는다. 그리고 신을 이용한다. 

 

나는 아무 희망 없이 살면서도 끝까지, 죽는 순간에도 어떻게든 살고 싶었는데, 그건 바로 담이 너 때문에. 희망 없는 세상에선 살 수 있었지만 너 없는 세상에선 살고 싶지가 않아서. 죽음은 너 없는 세상이고 그래서 나는 정말 죽고 싶지 않았어. (이건 진짜 진짜 명문이다. 우린 흔히 희망이 우리를 살게 한다고 생각하는데, 희망보다 너라니. 죽음은 너 없는 세상이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