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기록

평균의 종말ㅣ토드 로즈ㅣ평균의 개념을 다시 생각해보자

기로기 2024. 7. 8. 22:04

토드 로즈의 책 중 가장 먼저 읽은 책이다. 어제 올린 <집단착각> 읽기 전에 이 책부터 봤다.

이 책은 경제 양극화에 대한 책이 아니다. 교육에 대한 책이다. 시작부터 매우 흥미로워 나를 끌어당겼다. 

상식을 뒤엎는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가 생각났다. 우리가 당연하다 생각하는 것들은 모두 하나의 틀일 뿐이다.

 

선천이냐 후천이냐, 즉 특성이냐 상황이냐, 끊이지 않는 이 논쟁에 대해서 '상황마다 특성이 다르게 발현된다'고 설명한다.

내가 어릴 때 유명했던 그 유명한 <마시멜로> 이야기도 반박한다. 맥락이 중요하다는 것.

 

지능과 재능이란 게 줄세우기 되는 게 아니라 저마다 각각 다르게 지니고 있는 것이라면, 역설적으로 부모가 어떤 재능을 알아보고 길러줄 수 있는 환경이 더 부각되는 거 아닌가? 꼭 부모가 재력이 있어야 좋은 부모가 아니라, 자녀의 재능을 파악하고 강화해줄 수 있어야 좋은 부모라는 생각이 든다. 예전부터 사람마다 뭐가 됐든 자기가 잘하는 게 분명 있고 그것에 근접하게 가느냐 못 가느냐라고 생각했었는데, (부모가 재능을 파악해주는 경우이든 아니든) 결국은 자기자신을 잘 알아야 되고 그러려면 자신에게 솔직해야 한다는 게 지금의 생각이다. 자신에게 솔직하자는 게 한동안 내 화두였어서 더 좋았다.

나 자신에게 솔직하자. 내가 누구인지 잘 알아야 한다. 살아가면서 점점 더 자신을 알아가고 싶다. 

 

무리한 포지션을 잡고 나서 위기가 왔을 때, 내 원칙과 마인드도 다시 돌아보고, 집청소도 싹 하고 버릴 물건 버리고, 내 인생에서 진짜 중요한 게 뭔지도 다시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다. 확실히 나한테 1순위가 돈이 아니란 걸 분명히 하니까, 손실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가치를 지키면서 (예를 들면 자유로움, 소신, 몸과 정신의 건강 등) 살 수 있다는 것에 너무 너무 감사하는 마음, 나를 놓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오히려 기분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 같다. 

 

코로나 시국 이후 자주 했던 말 : 길은 하나가 아니다. 한국 사회의 문제점인 끔찍한 획일성에서 이제는 좀 나아가서 교육과 사상도 다양성의 시대로 나아가야 한다. 길이 여러가지인 사회가 되어야 한다. 한국은 왜 몰개성적이고 획일화된 사회가 된 걸까? 주입식 교육 때문일까? 유교 때문일까? 좁은 땅과 높은 인구밀도 때문일까? 아파트 문화 때문일까? 여러 이야기가 있지만 더 공부하고 생각해봐야 될 문제다. 

 

획일성과 관련해서 하나 더 하고 싶은 이야기. 지인들과 대화를 하다 보면 대화 주제가 깊거나 민감할수록, 내가 동의되지 않는 부분, 가치관이 다른 부분, 내가 듣기에 거부감이 드는 표현 등이 있을 수밖에 없다. 나의 발언도 마찬가지로 의도치 않게 상대에게 그렇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런 경우에 좀 더 열린 마음을 가지고, '그렇게 생각하는구나' 하며 여유있고 너그럽게 받아들이는 자세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인간은 누구나 어느 정도는 모순적인 존재니까. 나와 가까울수록 의견의 일치를 보려고 하고, 동조화되고자 하는 본능에 가까운 행동을 오히려 경계해야겠다. 편협한 사람이 되지 않으려면 정말 노력을 많이 해야된다고 요즘 느낀다. 좁은 사람, 극단적인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 중용. 발란스. 여유. 

 

아이러니는 저자도 (물론 그 과정이 전형적이지 않았지만) 하버드 출신이고, 추천사도 서울대 출신이다. 학벌주의에 대해서 이 책에서 깊게 파고들지는 않는데, 학벌사회가 무너지게끔 기득권이 두고 볼까? 라는 생각도 든다. 언젠가는 변하겠지 그 또한.

 

인간에게 평균을 적용한다는 게 얼마나 얼토당토 않은 건지 책을 통해 이렇게 공부를 하고도, 모두가 그런 사고방식을 지닌 사회에서 한평생 살아왔기 때문에 스스로 이걸 벗어나기도 굉장히 어려울 것이다. 그럼에도 최대한 사람에게 평균을 들이대지 않으려는 노력을 하겠다. 그런 점에서 최근 MBTI 신봉자들이 많은 분위기가 걱정된다. 인간의 성격을 단 4가지의 팩터로 16개로 나눈다는 발상도 부적절하고, 그 성격이란 것이 맥락과 상관 없이 고정적이라는 발상도 부적절하다. 정말 이게 유행에 그치지 않고 혈액형론보다 더 끈질기게 살아남아 수십년을 갈까봐 겁난다.

 

 

 

평균적인 신체 치수 따위는 없듯 평균적인 재능, 평균적인 지능, 평균적인 성격 같은 것도 없다. 평균적 학생이나 평균적 직원도 없고 그 점에서라면 평균적 두뇌 역시 없다. 이러한 일상화된 개념들 모두는 잘못된 과학적 상상이 빚어낸 허상이다. 

유형화와 계층화가 아주 기본적이고 당연하고 마땅한 일처럼 여겨지게 되면서 이제 우리는 그런 판단이 어떠한 경우든 예외 없이 판단을 받는 사람의 개개인성을 묵살하고 있다는 사실마저 더 이상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 케틀레 이후 150년이 지난 현재 우리는, 19세기의 그 시인들과 의사들이 우려했던 그대로 모두 평균주의자가 돼버렸다.

이들 교육적 테일러주의자들이 내세운 교육의 새로운 임무는 많은 학생들이 테일러화된 새로운 경제에 나가 활동할 만한 적성을 갖춰주는 일이었다. 이들은 평균적 근로자들로 이뤄진 시스템이 천재들로 이뤄진 시스템보다 효율적이라는 테일러식 원칙에 따르면서, 학교는 특출한 재능을 길러주려 애쓸 것이 아니라 평균적 학생을 위한 표준 교육에 힘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한 예가 존 D.록펠러가 기금을 대주어 설립된 이른바 일반교육위원회General Education Board.

손다이크의 등급 중심적 교육은 미로처럼 복잡하게 얽혀서 학생들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그 벽 안에 꼼짝없이 가둬놓고 있다. 교사들은 매 학년 말에 행정관들에게 평가를 받고 그 결과 등급에 따라 승진, 벌칙, 재직 자격이 좌우된다. 학교들과 대학들 자체도 주간지 <유에스 뉴스 앤 월드 리포트>처럼 재학생들의 평균 시험 성적과 GPA에 큰 무게를 부여하며, 여러 출판물에서 등급을 매기고 그런 등급이 대입 지망생들이 지원 대학을 정할 때 참고 기준이 된다. 기업들은 직원 채용 결정에서 지원자의 출신 학교 성적과 등급을 기준으로 삼고 있으며, 때로는 이런 기업들 자체도 직원들 중에 고급 학위 소지자와 명문대 졸업자가 얼마나 많은가에 따라 등급이 매겨진다.

평균주의는 우리에게 대가를 치르게 했다. '노르마' 닮은꼴 찾기 대회가 그러했듯 사회는 우리 모두에게 학교와 직장생활과 삶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특정한 편협한 기대치를 따라야 한다고 강요하고 있다. 그 결과 우리 모두는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되려고 기를 쓴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해서 우리 모두는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되되 더 뛰어나려고 기를 쓴다.


평균의 시대를 특징짓는 2가지 가정은 무엇인가? 평균이 이상적인 것이며 개개인은 오류라는 케틀레의 신념과 한 가지 일에 탁월한 사람은 대다수의 일에서 탁월성을 보일 가능성이 높다는 골턴의 신념이다. 그러면 이번엔 개개인의 과학이 내세우는 주된 가정은 뭘까? 개개인성이 중요하다는 신념이다. 즉 개개인은 오류가 아니며 개개인을 (재능, 지능, 인성, 성격 같은) 가장 중시되는 인간 자질에 따라 단 하나의 점수로 전락시켜서는 안 된다고 믿는다.

개개인 우선 접근법을 통해 입증된 그 발견 결과는 그룹 평균에만 의존한 발견 결과에 비해 차원이 뛰어나다. 이런 개개인 우선 접근법에서의 한 가지 난관은 막대한 양의 자료가 요구된다는 점이다. 그것도 평균주의 접근법보다 훨씬 더 많은 자료가 요구된다. 분석 후 종합 방식을 제대로 활용하려면 막대한 자료를 수집, 처리할 도구가 필요하지만 인간을 연구하는 대다수 분야에서는 100년이나 50년은 커녕, 심지어 25년 전까지도 그런 도구가 존재하지 않았다. 산업 시대에는 평균주의 방식이 대세였고 개개인 우선 방식은 뜬구름 잡기로 치부되기 일쑤였으니 그럴 만도 하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지금의 우리는 디지털 시대를 살고 있으며 지난 10년 사이에 막대한 양의 개개인 자료를 수집, 저장, 처리하는 것쯤은 아주 편리하고 시시한 일이 됐다. 단지 부족한 것은 이를 사용할 사고방식뿐이다.

2009년에 강제 등급 시스템을 활용했던 대기업은 42%에 이르렀는데 이 중에는 일명 '스택랭킹stack ranking(해마다 직원들의 성과를 평가해 하위 10%를 해고하는 제도. 평가 점수에 따라 직원들을 층을 쌓듯이 서열화한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라는 프로그램으로 유명한 마이크로소프트도 있었다.

인간과 관련된 중요한 진실이자 개개인성의 첫 번째 원칙인 들쭉날쭉의 원칙이 부각된다. 이 원칙에서는 일차원적 사고를 통해서는 복잡한 데다 '균일하지 않고 들쭉날쭉한' 뭔가를 이해할 수 없다는 관점을 취한다. 그렇다면 들쭉날쭉하다는 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할까? 다음의 2가지 기준에 부합돼야 한다. 첫 번째, 반드시 다차원으로 이뤄져 있을 것. 두 번째, 반드시 이 여러 차원들 사이에 관련성이 낮을 것. 들쭉날쭉성은 단지 인간의 체격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재능, 지능, 성격, 창의성 등등 우리가 관심을 갖는 인간의 거의 모든 특성이 들쭉날쭉하다.

조직에서는 처음 들쭉날쭉성을 받아들이면 흔히들 진흙 속에 묻힌 진주를 발굴할 방법을 찾아낸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 특이하거나 숨겨져 있던 재능을 알아볼 방법을 찾아냈다고 여기는 것이다. 하지만 들쭉날쭉성의 원칙에서는 다른 관점을 갖는다. 우리가 간과된 재능을 알아본 것이라 해도 그 재능은 특이하거나 숨겨져 있던 것이 아니라 진정한 재능이라고. 그동안 쭉 있어왔고, 들쭉날쭉한 특성을 가진 인간에게만 존재할 수 있는 그런 재능이라고. 따라서 진짜 난제는 재능을 구별할 새로운 방법 찾기가 아니라, 알아보지 못하게 시야를 방해하는 일차원적 눈가리개를 제거하는 일이다.

다른 사람들의 재능의 들쭉날쭉성, 즉 우리 아이들 직원들 학생들의 들쭉날쭉한 측면을 인정할 줄 알게 되면 그들의 미발굴된 잠재력을 알아보고 그런 강점을 제대로 활용하도록 이끌어주는 동시에 약점을 간파해 그 약점을 개선하도록 도와줄 가능성이 그만큼 높아진다.

쇼다의 연구는 개개인성의 두 번째 원칙인 맥락의 원칙을 구체적으로 밝혀준 것이었다. 맥락의 원칙에 따르면 개개인의 행동은 특정 상황과 따로 떼어서는 설명될 수도 예측될 수도 없으며 어떤 상황의 영향은 그 상황에 대한 개개인의 체험과 따로 떼어서는 규명될 수 없다. 다시 말해 행동은 특성이나 상황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이 둘 사이의 독자적 상호작용을 통해서 표출된다. 어떤 사람을 이해하고 싶다면 그 사람의 평균적 경향이나 '본질적 기질'을 이야기하는 방식을 취해서는 길을 잃기 십상이다. 그보다는 그 사람의 '맥락에 따른 행동 특징'에 초점을 맞추는 새로운 사고방식이 필요하다.

성품은 인간의 모든 행동과 다를 게 없다. 즉 맥락과 분리시킨 채로 이러니저러니 떠들어봐야 헛소리일 뿐이다. 우리 아이들에게 공감력, 존경심, 자제력 같은 도덕성을 어떻게 심어주느냐를 놓고 여전히 뜨거운 논쟁을 벌이고 있는 시대에, 또 전적으로 성실하거나 전적으로 불성실한 사람도 있다고 믿는 시대에 이런 중요한 도덕적 자질 모두가 아주 개별화된 상황 맥락별 기질에 따라 특징지어진다는 개념은 도발적으로 들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성품이 맥락적이라는 이런 개념은 사실 새로운 것도 아니다.

우리는 아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다양한 맥락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 심지어 가장 가까운 이들의 경우라 해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그런 탓에 제한된 정보를 기반으로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를 판단한다.

이제 우리는 누군가를 신경과민이라거나 공격적이라거나 쌀쌀맞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될 때마다 그것이 하나의 특정한 맥락에서만 그 사람을 판단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떠올려야 한다.

어떤 직장 동료가 이런저런 맥락에서 아무리 봐도 '까탈스러운' 사람 같아 보이더라도 회사 밖에서는 의리 있는 친구이자 자상한 언니이자 정겨운 이모일지 모른다. 또 그 점을 알고 나면 그 직장 동료를 함부로 판단하기가 힘들어진다. 선뜻 비호의적인 성격 특성 하나만으로 단정 지으면서 그 동료의 인간으로서의 본성, 즉 그 동료의 복잡성을 무시하지 못한다. 그 사람에게는 당신과 그 사람 둘이 함께 놓여 있는 그 순간의 맥락만이 전부가 아님을 명심한다면 마음의 문이 열려 본질주의 사고로는 어림없는 수준의 넓은 도량으로 타인을 더 깊이 이해하고 존중하게 된다. 게다가 이런 이해와 존중은 우리에게 성공과 행복을 가져다주는 긍정적 관계의 토대다.

 

우리는 흔히 어떤 특정 목표에 이르는 경로는 (그 목표가 읽기 습득이든 최고 실력의 운동선수든 회사의 운영이든 간에) 저 밖의 어딘가에 있다고 생각한다. 앞서 걸어갔던 여행자들이 닦아놓은 숲속의 보행로 같은 경로가 있다고 여기며 삶에서 성공하는 최선의 길은 그런 잘 닦인 보행로를 따라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경로의 원칙은 우리에게 다른 얘기를 전해준다. 우리는 어떤 경우든 자신만의 경로를 처음으로 내고 그 길을 닦으며 나아가는 것이라고. 우리가 내리는 모든 결정이나 우리가 겪는 모든 일에 따라 매번 우리에게 주어지는 가능성에 변화가 생기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다고.

내 결정들에 대해 따져보니 그 모든 결정은 하나의 믿음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우수성을 이루기 위해 나에게 유용한 길이 어딘가에 있지만 그 길이 어떤 형태일지 알아낼 수 있는 사람은 나 자신 뿐이라는 믿음이었다. 그리고 그런 길을 알아내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아야 했다.

현 교육 시스템은 한마디로 교육판 '노르마' 닮은꼴 찾기 대회에 해당한다. 일차원적 등급 매기기에 가학적일 정도로 초점을 맞추면서 모든 학생이 평균적 학생과 똑같이 하도록, 더 정확히 말하자면 다른 모든 학생과 똑같이 하되 더 뛰어나도록 강요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 교육 시스템은 심지어 학생들이 대학에 들어가기 전부터 획일성을 강요한다. 학생들은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싶으면 다른 모든 학생과 똑같은 교실에서 수업을 받고 똑같은 시험을 치르고 똑같은 과외활동을 하되 다른 학생들보다 더 잘하도록 강요당한다.

학생들과 그 가족들은 막대한 빚더미를 떠안아가면서까지 온갖 희생을 감수한다. 19세기의 등급 개념에 의거한 비좁고 가혹한 시스템에 따르기 위해, 즉 더 이상 일자리의 확실한 보증수표도 아닌 학위를 취득하기 위해 말이다. 우리의 평균주의 고등교육 시스템이 안겨주는 보장은 점점 낮아지는 중인 반면 고등교육 시스템이 부과하는 비용은 점점 높아지는 중이다.

개인적 생각을 밝히자면 무크의 가장 혁신적 측면은 낮은 비용이나 온라인 강좌라는 부분이 아니다. 그보다는 하버드대와 MIT를 비롯한 수많은 쟁쟁한 명성의 무크 강좌 제공자들이 해당 강좌를 모두 이수한 학생들에게 (수료증 같은) 자격증을 제공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무크는 개인화된 자격증 수여제가 본격적으로 전개되면 어떻게 될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표준화된 학위의 취득에 필요한 출석 시간을 얻기 위해 4년 동안 단 한 곳의 대학에 과도한 수업료를 내야 하는 대학 프로그램에 기대지 않아도 되고, 그 대신 자신이 택한 경력을 쌓기 위해 자신의 조건에 맞춰 자신이 원하는 비용으로 필요한 만큼의 자격증을 취득하면 된다.

3가지 개념(학위가 아닌 자격증 수여, 성적을 실력으로 대체하기, 학생들에게 교육 진로의 결정권 허용하기)은 고등교욱을 상의하달식 위계와 표준화를 중요시하는 테일러주의 공장을 모델로 삼은 시스템에서 탈피해 학생 각자가 자신에게 가장 잘 맞는 교육 진로를 따를 수 있는 역동적인 생태계로 변화시키는 데 필요한 개념들이다.

제임스 트러슬로 애덤스는 대공황이 한창이던 1931년에 출간된 <미국의 서사시The Epic of America>에서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말을 신조어로 처음 썼다. 애덤스는 이 아메리칸 드림을 당대의 물질주의에 대별되는 관점에서 논했다. "이것은 자동차와 높은 임금을 향한 꿈이 아니라 사회질서를 향한 꿈이다. 남녀 모두 누구나 다 타고난 재능을 한껏 펼칠 수 있고 타인들로부터 출생이나 지위라는 우연에 따른 배경과 무관한 본연의 모습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그런 사회질서를 동경하는 꿈이다." 원래 아메리칸 드림은 부자가 되거나 유명해지는 것과는 상관이 없는 말이었다. 그보다는 잠재력을 한껏 펼치며 살아갈 기회와 개인으로서의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는 차원의 문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