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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이 필요한 순간ㅣ김현철ㅣ생애주기별 인간의 고민

기로기 2024. 7. 1. 22:00

생애주기에 따른 여러 사회 문제를 짚어볼 수 있어서 좋은 책이었다. 저자의 이력이 눈길을 끌었는데, 의대를 졸업한 뒤 경제학자가 된 케이스인 것과 돌봄을 연구한다는 것. 

 

우리나라 최초 간호학 박사학위를 받은 간호대학 교수도 손주의 육아를 돕기 위해 조기은퇴하는 현실이 씁쓸했고, 비수도권이고 저소득층이면 병의 진단이 늦다는 현실이 가슴 아팠다. 코로나 시기 등교제한의 영향에 대해 크게 생각해 보지 않았던 관점을 제시해서 좋았다. 

 

그러나 평소 관심분야다 보니 새로운 소리 보다는 당연한 소리가 많긴 했다. 특히 육아 쪽은 너무 틀에 박힌 말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묘하게 남성이 육아를 '돕는다'는 시각이 깔려있었던 점은 아쉬웠다.

 

 

최근 20년 동안 경제학의 가장 중요한 업적이 무엇인지 묻는다면 "(임신 기간을 포함한) 다섯 살 미만 어린 시절 환경의 지대한 중요성을 밝힌 것"이라 답하겠다. 경제학이 이런 것도 연구하냐며 놀란 분도 계실 것이다. 하지만 '어린 시절 환경의 장기 효과'는 최근 경제학의 주요 연구 주제이고, 불우한 어린 시절은 불평등이 대물림되는 가장 중요한 경로라는 것도 밝혀냈다.

 

유사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을 교도소에서 섞지 않는 것만으로도 범죄 예방 효과가 있다. 범죄를 저지른 청소년에게 엄벌을 내려 무조건 교도소에 오래 머물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분들은 교도소 안의 친구 효과를 충분히 고려하지 못한 것. 엄벌만이 능사는 아니다.

 

프로젝트의 선행연구(파일럿)로 약 100여명의 가사 도우미를 선발하여 심층 인터뷰를 했다. 이들은 대략 30~40대 여성이며, 80% 이상이 자녀를 둔 여성. 50$ 이상이 대졸 이상의 학력 소지. 홍콩에서 주 6일 하루 평균 14시간을 일하고 있었으며, 모두가 영유아 혹은 노인 돌봄에 종사. 흥미로운 점은 고된 노동임에도 불구하고 이들 중 절대 다수가 현재 업무에 만족하며 홍콩에서 계속 일하고 싶어했다는 것. 빈곤 탈출 및 가족 부양을 위해 선택한 타국에서의 가사 도우미의 삶이 어려워도 그만한 보람을 느끼고 있었다. 이 설문 조사 결과를 보면서 이들을 '현대판 노예'라 칭하며 평가절하하고 노동 착취가 비판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 생각했다. (저자가 미국 명문대 교수직을 포기하고 홍콩으로 이주한 것도 가사도우미 제도 때문이었다고 밝힘)

 

많은 사람이 혜택을 보는, 경증 질환 치료를 저렴하게 하는 정책은 필요성이 낮지만 선거 기간 표심에 영향을 준다. 반면 소수의 사람이 혜택을 보고 목돈이 드는, 중증 질환 치료비를 줄여주는 정책은 꼭 필요하지만 득표에 별 도움이 안 된다. 그 탓에 건강보험이 가장 아픈 사람을 충분히 보호하는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한다. 이러한 한계를 넘어설 수 있도록, 정책 입안자와 국민의 분별력 있는 의지가 필요하다.

 

요약하면 우리나라는 적은 수의 의사가 장시간 노동과 짧고 효율적인 외래 진료를 통해 국민에게 충분한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하지만 의사 수요가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는 상황에서 의대 정원 증원은 고려해볼 만한 일이다. 충분한 의사의 공급은 노동 강도 개선, 외래 진료 시간 확대에 필요조건이기도 하다. 

 

좋은 정책은 인간 본연의 욕망을 있는 그대로 이용하면서 공공선을 창출해낸다는 걸 명심해야 한다. 

 

미국은 정부보다 시장의 역할을 중시한다. 공무원 임금이 민간에 비해 낮다. 능력이 뛰어난 사람은 민간 기업에서 일하라는 신호의 의미도 있다. 세수가 부족한 저개발 국가는 공무원 임금이 매우 낮다. 월급으로는 생활수준을 유지할 수 없다. 그런데 다양한 인허가 관련 권력을 갖고 있으니 부패가 만연함. 싱가포르는 완전히 다른 접근법을 취한다. 공무원에게 고임금을 주어 가장 능력 있는 사람들을 뽑음으로써 부패의 씨앗을 철저히 차단한다. 

 

주52시간제는 노동시간 총량을 원칙적으로 틀어막는 제도다. 사실 이렇게 노동시간을 일률적으로 규제하고 처벌하는 것은 바람직한 방향이 아니다. 지식 기반 경제 구조에서 고용 형태는 복잡하고 다양해지고 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주52시간보다 더 일하고 싶은 노동자에게 일하지 말라고 국가가 강요하는 게 과연 정당한지에 대한 의문이 있다. 정책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야지 회사와 국민의 일상을 지나치게 규제하고 조정하는 구실을 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이 제도는 탄력적으로 운용할 필요가 있다.

 

노동시간 감소는 거스르기 어려운 대세가 될 것. 그러나 주4일제 혹은 주4.5일제를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정하는 건 정밀한 연구가 필요하다. 직관만으로 무엇이 최선의 정책인지 정확히 아는 것은 불가능함. 그러므로 노동시간 감축을 위해서는 다양한 재정 지원 시범 사업이 필요. 가령 회사를 무작위로 선발해 절반은 주4일제, 또 다른 절반은 주4.5일제 도입을 위한 재정 지원을 해보는 것. 강제팔 필요는 없다. 이들 회사를 주5일제 회사와 비교해 여러 제도의 성과를 살펴본다. 노동 생산성, 삶의 질, 산업재해율 변화를 정밀하게 측정. 몇 년이 걸리더라도 과학적 증거를 쌓는다면 더 많은 사람에게 공감을 얻고 이해 당사자가 수긍하는 제도를 설계할 수 있다. 

 

우리나라 부모들이 바라는, 첫 자녀의 직업을 보여준다. 임금이 높은 최고경영자, 의사, 법률가, 교수 등은 남아가 갖길 바라는 직업. 여아는 패션 스타일리스트, 간호사, 약사, 교사 등 보수는 낮지만 가정을 돌보기 수월한 직업을 갖길 원함. 바로 이 지점에서 남녀차별이 남아 있다. (정말 아직도 이렇다고?)

 

최근 연구는 '엄마 효과'가 얼마나 큰지 보여준다. 영국의 경우 출산 전 약 88%였던 여성의 노동시장 참여율이 출산 뒤 약 50%로 줄어든다. 미국은 약 70%에서 35%로 감소한다. 연세대학교 한유진 교수 연구에 따르면, 우리나라도 출산전 65% 수준이던 여성의 노동시장 참여율이 출산 후 45%까지 떨어진다. 임금은 무려 68%나 줄어든다. 

 

우리나라는 얼마 전 '기업 이사회의 성별 구성에 관한 특례 조항'을 포함하도록 '자본시장과 금융투자업에 관한 법률'을 개정해 2021년 10월부터 자산 2조 원 이상의 기업에는 여성 이사를 반드시 1명 이상 선임하도록 함. 이는 여성 임원이 이미 있는 회사엔 영향이 없고, 없는 회사를 강제하는 하수의 방법. 이보다는 여성 임원을 많이 배출하는 회사에 세제 혜택을 주는 등 부드러운 개입이 불필요한 사회적 갈등을 줄이는 고수의 방법이다. 여성 전용 주차장도 오답이다. 정답은 어린아이와 노약자 동반 가족을 위한 주차장이다. 남녀 모두가 혜택을 누릴 수 있기에 불필요한 젠더 갈등이 생길 여지가 없다. 하지만 돌봄을 주로 여성이 담당하는 현실이니 대부분의 혜택은 여성이 누릴 것.

 

코로나19 팬데믹 3년 동안 사실상 전 국민이 감염되었고, 이 중 사망자 수는 총 3만4,960명. 연평균 1만1,652명. 그런데 2018년 폐렴으로 죽은 사람은 2만8,280명, 자살로 생을 마감한 사람은 1만3,670명, 교통사고 사망자는 3,781명. 코로나 감염 사망자 수가 폐렴이나 자살로 인한 사망자 수와 크게 다르지 않은데, 왜 우리는 유독 코로나19에만 집중했던 것일까? 가용성 편향의 역할이 컸다고 생각한다.

 

등교 제한의 대가는 앞으로 100년에 걸쳐 코로나19 시대를 겪은 아이들이 모두 사망하는 그날까지 지불해야 할 것. 한번 형성된 비인지 기능은 잘 변하지 않고, 교육은 수명에까지 영향을 주기 때문. 미국과 유럽에서 인구당 감염률이 우리나라의 무려 50~100배 수준인 시절에도 가급적 등교 수업을 진행한 이유.

 

등교 제한의 피해는 저소득층에 집중된다. 학력 저하가 저소득층에서 더 크게 나타남. 고소득층과 저소득층 아이 사이 벌어진 학력 차이는 특단의 대책이 없는 한 한 세기 동안 이어질 수 있다. 저소득층의 경우 온라인 수업을 위한 환경도 좋지 않고, 사교육을 통한 학업 손실 해결도 어렵다. 이에 비해 여건이 좋은 아이들은 학원과 과외 수업을 통해 학업 효율성을 올릴 수 있다.

 

초등학생은 전국 단위 시험이 없어 등교 제한이라는 전무후무한 사건이 벌어졌는데도 그것이 학생들의 학업 성취에 미친 영향을 알 길이 없다. 학생들에게 지나친 시험 부담을 주는 것은 문제지만, 코로나19 사태를 겪으며 적어도 1-2년에 한 번씩 학생들의 성취를 체계적으로 수집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아울러 학생들의 학력뿐만 아니라 이른바 비인지 기능(가령, 사회성, 끈기 등)에 대한 체계적 조사도 필요하다고 생각.

 

우리나라에서의 등교 제한은 고등학생의 '평균' 학업 성취도를 낮추지 않았지만 학습 불평등은 증가시켰다. 잘하는 친구들은 더 잘하고, 못 하는 친구들은 더 못하게 되었다. 왜? 추론을 해보면 상위권 학생들에게 공교육은 애초에 사교육 같은 대체 학습에 비해 효과적이지 않았을 가능성. 그렇기에 팬데믹으로 등교하지 않는 동안 본인 수준에 맞는 공부를 해서 성적 향상 가능성. 또 사우이권 학생의 부모는 이 기간 아이들의 학업에 더 적극적으로 나섰을 것. 반면 하위권 학생들에게 등교는 공부할 수 있는 '최소한의' 환경을 제공한다. 학교를 가지 않으니 학업에 손을 놓아버렸을 수 있다. 부모가 교육에 적극적일 가능성도 낮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