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잘 쓴다. 그녀의 글에는 힘이 있다. 이 책은 과거 록산 게이가 여러 매체에 기고한 칼럼들을 엮은 책이다. 정치, 인종, 젠더, 예술 등에 대한 여러 견해를 읽을 수 있다. 특히 예술가의 도덕성에 관한 록산 게이의 단호한 태도에 속이 시원하고 깊이 공감한다.
책 가장 후반부에 있는 고민 상담 글에서, 사랑에 대한 록산 게이의 생각은 전문 그 자체로 너무 좋아서 특정 구절만 따로 기록하지 않았다.
읽고, 생각하고, 쓰고, 나의 세계를 만들어간다는 것은 정말 멋진 일이다. 나의 감정을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언어로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은 가슴 벅찬 일이다.
66)무엇을 만들어내고, 무엇을 소비하고, 누구와 협업할지를 두고 나는 매일 가능한 한 최선의 결정을 내리려 애쓴다. 그러나 세상 안에서 살아가고, 자본주의 사회의 일부가 되려면 도덕적 타협이 필요하다. 나는 순수성을 추구하지 않는다. 그런 건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매 순간 최선을 다하고,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여겨질 때 나의 입장을 밝히려고 노력한다.
그들은 무대응을 표현의 자유를 보호하기 위한 원론적인 입장인 양 포장하지만, 실상은 자기들의 최소 수익을 보장하려는 조치다.
개인으로서 내가 유의미하게 선거에 영향을 미칠 수 있었으리라 생각하진 않지만, 훨씬 더 많은 활동을 할 수 있었음에도 그러지 않았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그 점에 대해 책임을 깊이 통감한다.
오랫동안 우리는 나쁜 남자도 좋은 예술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했다. 어떤 이들은 창작물과 창작자를 아무렇지 않게 분리해서 생각한다.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고 그렇게 되고 싶지도 않다. 사람이란 복잡한 존재이며 누군가를 그가 저지른 최악의 행동으로만 단정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지만, 가령 나는 이제 빌 코즈비의 수 많은 성폭행 혐의를 떠올리지 않고서 <코즈비 쇼The Codiy Show)를 볼 수가 없다. 불현듯 그의 농담들이 하나도 웃기지 않다. 나의 흑인성과 영화 속에서 재현되는 흑인의 삶을 더 많이 보고 싶다는 욕망을 내 여성성, 내 페미니즘, 내 성폭력 경험, 내 인간성과 분리할 수 없듯, 나는 작품과 예술가를 분리할 수 없다.
우리는 이미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알고 있다. 여성들은 공개적으로든 사적으로든 언제나 상처를 증언한다. 그런데 증언이 시작되면 유독 남성들이 성폭력이 그토록 만연하다는 데 충격을 받고 놀라는데, 그건 그들이 망각이라는 사치를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다음 겁에 질려서는 모든 남자가 가해자는 아니고 일부 나쁜 남자들과 한데 묶이고 싶지 않다며 허겁지겁 여성들의 고통을 여성들만의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여성들이 자신들의 증언에 또 새로운 내용을 추가하지 않으려고 온갖 종류의 방어적인 행동과 전략을 취해야 할 만큼 충분히 많은 남자가 가해를 저지르고 있음에도, 남자들은 그 사실을 직면하지 않기로 선택한다. 그리고 너무 당황한 나머지 이렇게 묻는 남자들도 있다. "내가 뭘 할 수 있을까요?" 답은 간단하다.
남성들도 여성들이 오랜 세월 해왔던 증언에 참여하면 된다. 크고 작은 방식으로 여성들에게 상처 주었다고 고백하면서 앞에 나서서 "미투"라고 말하면 된다. 좁은 사무실 복도에서 여성을 몰아세웠다고, 동료들에게 외설적인 발언을 했다고, 거절을 거절로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여성이 섹스에 죄책감을 느끼게 함으로써 취약하게 만들었다고 증언하면 된다. 남성들이 폭력이나 추행을 목격하고도 외면하거나 웃어넘기거나 마음속으로 여성이 바라는 일일 거라 여겼던 경험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일 역시 힘이 될 것이다. 이제는 남성들이 스스로 답을 찾기 시작할 때다. 여성들이 만들어내지도 않은 문제를 여성들끼리만 해결할 수는 없으니까.
범죄가 밝혀지고, 가해자가 맹비난을 받고, 머지않아 이 모든 일을 용서받은 듯 '컴백'을 기획하는 익숙한 서사를 목격하는 일은 괴롭다. 많은 이들이 복귀를 바랄 정도로 본인을 문화적으로 중요한 존재라고 여긴다는 게 괴롭다. 이 남성들과 일부 여성들이 피해자들에게 사적으로 어떠한 사죄를 했든 상관없이 체면을 지키거나 대중을 달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정으로 참회하기 위한 공개적인 행동이 있어야 한다. 그때까지 그들은 회복적 정의든 구원이든 받을 자격이 없다. 그것이 바로 그들이 저지른 잘못에 대해 치러야 할 대가다.
가해자들의 유산을 두고 괴로워한다는 건 좋은 작품을 위해서라면 피해자들이 어느 정도는 대가를 치러도 된다는 뜻이므로. 진실은, 어떠한 30분짜리 방송도 누군가의 고통에 보상이 될 만큼 대단치 않다는 것이다. 대신 나는 얼마나 많은 여성들의 커리어가 망가졌는지를 떠올린다. '천재'랍시고 피해자의 야망과 존엄보다 본인의 권력욕과 통제욕을 채우는 데만 혈안이 돼 있었던 남자들 때문에 얼마나 많은 이들이 꿈을 포기해야 했는지를 떠올린다. 악한 남자들이 부귀영화를 누리게 해준 침묵, 수십 년 동안이나 강요된 그 침묵과 협박과 착취를 전부 기억한다. 그렇게 떠올리고 기억하고 나면 형편없는 남자들의 위대한 예술이라 치부되는 것들 따위에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는다.
어느 분야나 탁월하고 독창적이며 신비로우면서도 타인들을 존중할 줄 아는 창조적인 사람은 많다. 예술적인 천재성은 결코 희귀하지 않으며, 우리는 그런 이들이 만든 작품을 향해 돌아설 수 있고 그래야만 한다.
<채울 수 없는>의 가장 큰 잘못은 상상력의 심각한 부족이다. 이성애자 남성이 진심으로 미인대회 출전자들을 사랑할 수 있고 젊은 여성을 코치하면서 자신의 남성성에 확신을 가질 수 있다는 점을. 혹은 어린 레즈비언이 이성애자 절친을 짝사랑하지 않을 만큼 스스로를 아껴줄 수 있다는 점을, 혹은 뚱뚱한 소녀가 체중 감량 없이도 행복하고 건강하고 괜찮은 삶을 살 수 있다는 점을 이 드라마는 상상하지 못한다. 이 드라마는 패티가 뚱뚱하던 시절 패티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문제였을지 모른다는 상상을 추호도 하지 못한다. 어쩌면 패티가 복수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어떤 사이즈를 입든 스스로를 사랑하는 것임을, 어떤 사이즈를 입든 사랑받는 사람에게 사랑스럽게 보이는 것임을, 뚱뚱해도 아름다운 게 아니라 뚱뚱한 몸이기에 아름다운 것임을 이 드라마는 상상하지 못한다.
마돈나 인터뷰 : “내가 늘 관심을 갖고 웅호해온 굉장히 중요한 주제들을 많이 다루고 있어요. 여성의 권리, 동성애자의 권리, 시민의 권리를 위해, 항상 약자를 위해 싸우는 거요." 마돈나는 말한다. "난 항상 억압받는다고 느껴왔거든요.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겠죠. '나 참, 그런 말을 하다니 우습지도 않군. 당신은 성공한 백인에 부유한 팝스타잖아.' 하지만 나는 커리어 내내 온갖 불쾌한 일을 겪어왔고, 그 이유 중 상당 부분은 내가 여성이고 관습적인 삶을 거부하기 때문이었어요. 난 무척 파격적인 가족을 꾸렸거든요."
"예술은 나를 살아 있게 해줘요.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로는 내내 비탄에 잠겨 있고 상심해 있었어요. 사람들이 내가 얼마나 성공했다고 여기든 상관없이 커리어에서도 힘든 일이 많았어요. 연인과 가족과 사회의 배신으로부터 살아남을 수 있었던 유일한 방법은 예술가로서 창작하는 거였어요. (록산: 예술을 빼면 무엇이 작업을 계속할 수 있는 원동력인가요?)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고 싶어하는 마음이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다른 시선으로 삶을 바라보게 해주고 싶어요. 발전에 기여한다는 건 창조의 일부가 되거나 파괴의 일부가 되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설명하기 어려운데, 숨쉬기 같은 거죠. 그러니 창작을 하지 않는다는 건 상상할 수가 없어요. 전남편과도 그런 논쟁을 하곤 했는데, 남편은 묻곤 했죠. "왜 또 이걸 해야 해? 왜 또 앨범을 내야 해? 왜 투어를 가야 해? 왜 영화를 만들어야 해?" 나는 이렇게 대꾸 했어요. "내가 왜 나 자신을 설명해야 해?" 그런 질문을 받는다는 건 매우 성차별적인 일이라고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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