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기록

나라를 위해서 일한다는 거짓말ㅣ노한동ㅣ행시 출신 공무원의 10년

기로기 2025. 3. 18. 21:45

대학교 재학 중 '차원이 다른 삶'을 꿈꾸며 행정고시에 합격한 엘리트가 10년의 공직생활을 제 발로 박차고 나온 뒤 대한민국 공무원 사회의 문제점을 책으로 펴냈다. 책 컨셉을 알고 나서 꼭 읽어보고 싶었다. 보수적이며 공개발언하기를 꺼리는 분위기일 공직 생활에 대해 작정하고 비판한 책인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읽어 보니 이름과 얼굴을 다 공개하고 쓴 책임에도 꽤나 비판의 수위가 높아서 용기 없이는 내지 못했을 책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책이라 일정 수준 정제된 표현으로 다듬어서 낸 게 이 정도면 실제로는 얼마나 빡치는 일이 많을까 싶다.) 저자 스스로도 그 의미를 잘 알았을 거고 주변에서도 반대가 있었던 것 같다. 그 반대는 충분히 현실적이고 합당할 수 있는데, 그럼에도 이렇게 책으로 당당하게 출판한 것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평소 즐겨 보던 블로그에서 추천하는 것으로 이 책을 처음 알게 되었고, 온라인 서점에서도 잘 보였고, 친한 친구도 읽고 있다고 하고, 오프라인 서점에서도 매대에서 눈에 띄게 배치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꽤나 호응을 얻고 있는 듯하다.

책을 읽으면서 좋은 구절에 북클립을 하면서 읽는데 어느 순간 북클립을 하기를 포기했다, 표시할 구절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에. 보고를 위한 보고, 보고서를 위한 보고서, 보여주기식, 어떻게든 책임 안 지고 빠져나갈 구멍 만들기, 무난하게 버티기...

 

저자가 문체부에 있었기 때문에, 한강 작가를 포함한 문화계 블랙리스트 사건이나 호날두, 김연경, 안세영 등 스포츠 선수와 관련된 이야기도 나온다. 여론이 들끓을 때 공직에서는 어떤 움직임이 벌어지는지 알 수 있어서 매우 흥미로웠다. 탑다운으로 지시가 내려오고 내려오면서 최초 발언자가 어떤 의도로 정확히 어떻게 말했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을 가족오락관의 게임에 비유했는데 너무 웃겼다. (웃을 일이 아님) 하지만 저자가 갈수록 책을 안 읽는 한국사회의 문제점을 수요(국민)보다는 공급(출판계와 정부 지원)에서 찾으려는 관점은 새롭긴 했지만 책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동의하기 어려웠다. 정말 읽고 싶을 만한 훌륭한 책, 타겟을 위한 재미있는 책이 없어서 독자들이 책을 안 읽는다고 하기에는 개성 넘치고 멋진 책이 넘쳐나서 다 읽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를 정도인데... 책에는 원래 관심이 전혀 없는 독자조차 읽고 싶게 만드는 책이라는 건 대체 뭔가, 너무 이상적이지 않나 싶었다. 

 

공무원 조직의 현실에 대해 조금이라도 궁금한 사람이라면 추천하고 싶다. '공직'이라는 말처럼 국민의 삶과 맞닿아있는 직직업군이니 만큼 더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변화가 조금씩이라도 있으면 좋겠다. 나는 내 성격상 나에게 공무원이라는 직업이 얼마나 안 맞을지 어려서부터 잘 알았기 때문에 단 한 번도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책을 통해 느껴지는 저자의 성격상 (아무리 행정고시 출신이라 해도) 공무원으로서 얼마나 현타 오고 이해가 되지 않는 순간들이 많았을지 알 것 같았다. 이제라도 본인 다운 인생을 꾸려가실 거 같아서 응원하고 싶다. 청년들이 다 자기 적성과 성격에 맞는 일을 하고 살길 응원하고 싶다. 작가의 다음 행보가 궁금하다. 계속 전업 작가의 길을 걸으실지.

 

32)공직사회는 머리를 맞대기는커녕 서로를 불신한다. 상급자는 애매한 단어를 사용하여 언제든 내가 시키지 않았다고 발뺌할 준비를 하고, 하급자는 잘못을 위의 탓이라고 증명하기 위해 자료를 남기는 데 열성이다. 상황이 이런데 정책이 잘 돌아갈 리가 없다. 한 마디로, 공직사회는 끊임없는 면피의 세계다.

 

39)강사가 주로 내게 지적한 문제는 면접에 임하는 자세였다. 남들과 토론할 때 상대방의 발언을 시시콜콜 모두 반박하려는 자세, 심사위원의 말에 무조건 긍정하지 않고 자신의 논리를 자꾸 전개하려는 태도를 특히 문제 삼았다. (저자는 아마도 이런 태도 때문에 행시 최종 면접에서 떨어진 적이 있었다고 한다. 이듬해 강사에게 지적을 받고 고쳐서 최종 합격하여 공직자의 길을 걷게 된다. 그런데 사실 애초에 공직에 안 맞을 성격이었던 거다..)

 

44)블랙리스트와 같은 큰 사건이 아니더라도, 사골 우려먹듯 반복되는 정책의 재활용, 편리한 현상 유지, 뒷북 대응 등 정부의 아마추어리즘은 토론이 박멸된, 튀지 않는 이들의 공직사회가 만들어 낸 무난한 복종의 결과물이다. 영혼 없이 지시받은 대로 떠드는 관리자들, 회의만 시작되면 고개를 숙이고 업무수첩에 상급자의 지시를 빼곡하게 적을 줄밖에 모르는 실무자들. 그들의 '무난한' 태도가 만들어 낸 결과는 태만하고도 무심한 겉모습과는 달리, 실상 매우 파괴적이고 때로는 악하기까지 하다. (무난함이 파괴적이고 악하기까지 하다는 표현이 너무 너무 맘에 들었다.)

 

56)진짜 문제는 애초에 그들이 갖고 있는 분야에 대한 미천한 이해도다. 실제로 미디어 환경의 변화와 저작권에 대해 한참을 보고하는데 장관이 OTT가 대체 무엇이냐고 되물어 회의 석상에 있던 모두가 아연실색한 사례도 있을 정도이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97)이러한 구조에서 관료는 똑똑할수록 조직 우선주의와 상명하복이 가장 유리한 생존 기술임을 더욱 치열하게 터득한다. 즉, 정책 대상의 입장과 기분을 헤아리고 현장에 집중할 시간에 조직과 윗사람의 의도를 읽기 위해 모든 신경을 집중하는 것이 남는 장사라는 뻔한 결론이 도출된다. 그 결과 관료에겐 정책 대상을 자신이 성공하기 위한 재료쯤으로 보는 오만한 자세가 깃든다. 

 

167)직업 관료의 순수한 영혼도, 유능함도 사실 그다지 본 적이 없었던 탓이다. 정치와 집권 세력은 관료를 때리며 국민에게 표를 얻는다. 마찬가지로 관료는 정치와 집권 세력의 변덕을 탓하며 자신의 무능과 철학의 부재를 교묘히 감춘다. 케이와 K 사이에서 휩쓸리는 모습을 보며 우리가 읽어야 할 진짜 함의는 바로 여기에 있다. 집권 세력과 관료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서로 든든한 방패막이 역할을 한다는 것. 관료는 순진한 피해자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사실은 정책 실패의 지능적 공범이라는 사실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