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기록

자유로부터의 도피ㅣ에리히 프롬ㅣ적극적인 자유를 추구하자

기로기 2025. 3. 15. 21:20

원래도 유명한 작가지만, 요즘 서점에서 더 잘 눈에 들어오길래 읽게 된 책이다.
우연히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랑 동시기에 봤는데 둘 다 나치를 소재로 하기 때문에 시너지가 아주 좋았다.
이 책은 유독 통째로 저장하고 싶은 문단이 많았다. 인간의 가학성과 피학성에 대한 통찰이 훌륭하다.

인간이 얼마나 남들과 달라서 느끼는 소외와 외로움을 두려워하고, 빨간약보다 파란약을 택하며 사는가 싶다. 

 

에리히 프롬의 다른 책들도 읽고 싶다. 읽고 싶은 책은 늘어만 간다.

언젠가 꼭 독일에 가서, 잘못된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고자 반성해온 흔적들을 보고 싶다.



그것이 아내든 자식이든 가게 점원이든 웨이터든 길거리 거지든 간에, 자신의 지배를 받는 대상에 대해 그는 '사랑'의 감정뿐만 아니라 감사의 감정까지 느낀다. 그는 그들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그들의 삶을 지배하고 싶어 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사실 그는 그들을 지배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다.' 그는 물질적인 것, 칭찬, 사랑의 확인, 재치와 재기의 과시, 또는 관심을 보이는 방법으로 그들을 매수한다. 그는 그들에게 모든 것을 줄 수 있다. 다만 한 가지, 자유와 독립에 대한 권리만 제외하고. 이런 관계는 특히 부모와 자식의 관계에서 자주 발견된다. 여기서 지배, 그리고 소유의 태도는 자식에 대한 '자연스러운' 관심이나 자식을 보호하려는 감정처럼 보이는 것으로 은폐되는 경우가 많다. 자식은 황금 우리 속에 넣어지고, 그 우리를 떠나고 싶어 하지만 않으면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다. 그 결과 자식은 나중에 자라서 사랑을 몹시 두려워하는 경우 가 많다. 그에게 '사랑'은 자유를 추구하다가 붙잡혀서 어딘가에 갇히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많은 관찰자들에게는 가학증보다 피학증이 더 수수께끼로 보였다. 남을 해치거나 지배하고 싶어 하는 것은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지만, 지극히 자연스러워 보였다.

171)개인의 자아를 제거하여 참을 수 없는 허무감을 극복하려는 시도는 피학적 충동의 일면일 뿐이다. 또 다른 일면은 자기 밖에 있는 더 크고 더 강력한 전체의 일부가 되어 그 속에 빠져들고 거기에 참여하려는 시도다. 이 외부의 힘은 사람일 수도 있고, 어떤 제도나 신, 국가, 양심 또는 정신적 충동일 수도 있다. 절대 흔들리지 않을 만큼 강력하고 영원하고 화려하게 느껴지는 힘의 일부가 되어, 그 힘의 기운과 영광에 참여하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자신의 자아를 포기하고, 자아와 결부된 힘과 자존심을 모두 버리고, 개인으로서의 본래 모습을 잃고, 자유를 포기한다. 하지만 그 대신 강한 힘 속에 빠져들고 참여함으로써 새로운 안전과 새로운 자부심을 얻고 또한 회의의 고통에서도 안전할 수 있다. 피학적인 사람은 제 주인이 외부의 권위든 아니든, 주인을 자신의 양심이나 정신적 충동으로 내면화했든 아니든 결정을 내려야 하는 부담에서 해방되고, 자신의 운명에 최종 책임을 져야 하는 부담에서도 해방되고, 그리하여 내려진 결정에 대한 회의에서도 해방된다. 그는 또한 내 삶의 의미는 무엇이고 '나'는 누구인가 하는 의문에서도 해방된다. 이런 의문에 대해서는 그가 달라붙은 강력한 힘과의 관계가 대답해준다. 삶의 의미와 그 자신의 정체성은 그의 자아가 빠져든 보다 큰 전체가 결정해준다.
피학적 유대는 원초적 유대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원초적 유대는 개별화 과정이 끝나기 전에 존재했다. 개인은 아직도 '그'의 자연적 세계와 사회적 세계의 일부이고, 아직 주위 환경에서 완전히 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원초적 유대는 그에게 진정한 안전을 주고, 그가 어디에 속해 있는지에 대한 지식을 준다. 피학적 유대는 도피다.

그는 스스로 의견에 도달했다는 환상에 빠져 있지만, 실제로는 권위자의 의견을 채택했을 뿐이면서도 이 과정을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그는 신문에서 읽은 것을 거의 정확하게 '그 자신'의 의견으로 대답할 것이다. 더욱이ㅡ이것이 가장 중요한 점이다ㅡ자기가 말하고 있는 것이 스스로 생각한 결과라고 믿는다. 만약 그가 작은 공동체에서 살고, 그 공동체에서는 정치적 의견이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 대물림된다고 하면, '그 자신'의 의견은 엄격한 부모의 지속적인 권위에 그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지배를 받을지 모른다. 또 다른 독자의 의견은 세상물정에 어두운 사람으로 보일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잠시 당황한 결과일 수 도 있다. 따라서 그의 '생각'은 본질적으로 위장이고, 경험과 욕망과 지식이 자연스럽게 결합한 결과는 아니다. 심미적 판단에서도 같은 현상을 찾아볼 수 있다. 보통 사람은 박물관에 가서 렘브란트 같은 유명한 화가의 작품을 보면 그림이 아름답고 인상적이라고 판단한다. 그러나 그의 판단을 분석해보면, 그는 그림에 대해 어떤 특별한 내적 반응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림이 아름답다고 생각해야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아름답다고 생각할 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음악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나 지각 작용에도 같은 현상이 뚜렷이 나타난다. 유명한 풍경을 바라볼 때에도,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는 그림에서 같은 데서 수없이 본 그림들을 떠올린다. 

학교에 가고 싶을 때도 있고 가야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갈 때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면, 아이는 훨씬 더 행복한 기분을 느낄 것이다. 하지만 의무감의 압박이 너무 크기 때문에, 아이는 남들이 그에게 기대하는 바를 '그 자신'이 원한다고 느끼는 것이다.
대다수 사람은 자발적으로 결혼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이다. 그러나 분명히 말하건대, 의리나 의무감 때문에 의식적으로 결혼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 자신'이 정말로 원해서 결혼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남자(또는 여자)가 실제로는 결혼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사건에 붙잡혀 모든 탈출구가 봉쇄된 것처럼 보이는데도 어떤 사람과 결혼하고 '싶다'고 의식적으로 믿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는 결혼을 앞둔 몇 달 동안 '그 자신'이 결혼을 원한다고 굳게 믿고 있다. 그런데 이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오히려 뒤늦게 알려주는 것은 결혼식 날 갑자기 공황 상태에 빠져 달아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는 사실이다. 그가 분별력 있는 사람이라면 이 감정은 몇 분밖에 지속되지 않을 것이고, 결혼하는 것이 당신의 뜻이냐
는 질문에 그는 흔들리지 않는 확신을 가지고 그렇다고 대답할 것 이다.
사람들이 결단을 내리거나 무언가를 원할 때, 실제로는 그들이 앞으로 하게 될 일을 '원해야 한다'는 내적 • 외적 압박에 따르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를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얼마든지 인용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인간이 결단을 내리는 현상을 관찰해보면, 실제로는 관습이나 의무나 단순한 압박에 굴복하는 것인데도 '그들 자신'의 결단인 것처럼 잘못 생각하는 경우가 너무 많다는 느낌을 받는다. 개인적 결단을 사회적 존재의 초석으로 삼는 사회에서는 '독창적인' 결단이 비교적 드문 현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시민이 나치즘의 강령에 아무리 반대해도. 외톨이가 되는 것과 독일에 소속감을 느끼는 것 가운데 하나를 택해야 한다면 대다수 사람은 후자를 택할 것이다. 나치가 아닌데도 나치에 대한 공격을 독일에 대한 공격으로 느끼기 때문에 외국인들의 비난에 맞서서 나치즘을 옹호하는 경우도 많이 관찰할 수 있다. 고립되는 것이 두렵고 도덕적 원칙이 상대적으로 약하기 때문에, 어떤 정당이든 일단 국가 권력을 장악하면 국민 대다수의 충성을 얻을 수 있다.
이러한 고찰은 정치적 선전 문제에 중요한 하나의 공리를 낳는다. 즉 독일 자체에 대한 공격, '독일인'에 대한 비방적 선전(예컨대 제1 차 세계대전 당시의 '훈족'의 상징 같은 것)은 나치 체제와 자신을 동일시하지 않는 사람들의 충성심까지 강화할 뿐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이 문제는 교묘한 선전으로는 근본적으로 해결될 수 없고, 모든 나라에서 한 가지 근본적인 진리가 승리를 거두었을 때 비로소 해결될 수 있다. 그 진리란 윤리적 원칙이 국가의 존재보다 위에 있으며, 개인은 이 원칙을 지킴으로써 과거 • 현재 • 미래를 통하여 이 신념을 공유하는 사람들의 공동체에 속할 수 있다는 것이다.
노동자 계급과 자유주의적 중산층과 가톨릭 부르주아지의 소극적 또는 체념적인 태도와는 대조적으로, 소상인과 장인과 화이트칼라로 이루어진 하류 중산증은 나치의 이념을 열렬히 환영했다. 

나치즘은 진정한 정치적 • 경제적 강령을 전혀 갖고 있지 않았다. 나치즘의 강령 자체가 철저한 기회주의라는 사실을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 문제가 되는 것은 정상적인 발전 과정에서는 돈이나 권력을 얻을 기회가 거의 없는 수십만 명의 프티부르주아가 이제는 나치 관료 체제의 일원으로서 부와 특권을 자신에게도 나누어 달라고 상류계급을 압박하여 상당히 큰 몫을 얻어냈다는 사실이다. 나치 조직의 구성원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는 유대인과 정적으로부터 빼앗은 일자리가 주어졌고, 나머지 사람들은 더 많은 빵을 얻지는 못했지만 '구경거리'를 얻었다. 이런 가학적인 구경거리, 그리고 나머지 인류에 대한 우월감을 주는 이념은 그들에게 감정적 만족감을 안겨주었고, 이 만족감은 그들의 삶이 경제적으로 문화적으로 빈곤해졌다는 사실을 적어도 당분간은 벌충해줄 수 있었다.

240)권위주의적 성격의 본질은 가학적 충동과 피학적 충동에 동시에 존재하는 것으로 설명되었다. 가학증은 타인에 대해 파괴성이 다소 섞인 무제한의 지배력을 지향하는 것으로 이해되었고, 피학증은 압도적으로 강한 힘 속에 자신을 용해시켜 그 힘의 영향력과 영광에 참여하기를 지향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가학적 경향과 피학적 경향은 둘 다 고립된 개인이 고독을 참지 못하고 그 고독을 극복하기 위해 공생 관계를 필요로 하는 데에서 생겨난다.
'가학적 권력욕'은 <나의 투쟁>에 다양하게 표현되어 있다. 그것은 히틀러와 정적의 관계를 특징지을 뿐만 아니라 히틀러와 독일 대중의 관계를 특징짓는 것이기도 하다. 그는 독일 대중을 전형적인 가학적 태도로 경멸하고 '사랑'하는 한편, 정적에 대해서는 그의 가학증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인 파괴적 경향을 보여준다. 그는 대중이 지배에서 느끼는 만족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대중이 원하는 것은 더 강한 자가 승리하고 더 약한 자는 전멸하거나 무조건 항복하는 것이다."

강자에 대한 사랑과 무력한 약자에 대한 증오는 가학-피학적 성격의 전형적인 특징이고, 이것은 히틀러와 그 추종자들의 정치적 행동을 대부분 설명해준다. 바이마르공화국 정부는 나치를 관대하게 다루면 그들을 달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정부는 나치를 달래는 데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힘과 굳은 의지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바람에 나치의 증오마저 불러일으켰다. 히틀러는 공화국이 허약했기 때문에 싫어했고, 재계와 군부의 지도자들은 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존경했다. 히틀러는 이미 기틀을 잡은 강한 힘과는 절대로 맞서지 않고, 그가 보기에 본질적으로 무력한 집단하고만 싸웠다. 히틀러의ㅡ그리고 이 점에서는 무솔리니의ㅡ'혁명'은 기존 세력의 보호 아래서 일어났으며, 그들이 즐겨 공격한 대상은 자신을 방어할 수 없는 약자들이었다. 영국에 대한 히틀러의 태도를 결정지은 요인은 여러 가지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이 심리적 열등 감이 가장 중요한 요인이었다고 감히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영복 이 강하다고 느낀 동안은 히틀러도 영국을 사랑하고 찬미했다. 그의 저서는 영국에 대한 이 사랑을 표현하고 있다. 하지만 뮌헨 협정을 전후하여 히틀러는 영국의 지위가 약해진 것을 알아차렸고, 그러자 그의 사랑은 증오와 파괴욕으로 바뀌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유화책'은 히틀러 같은 성격을 가진 사람에게는 우정이 아니라 증오를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는 정책이었다.
지금까지 우리는 히틀러의 이념에 있는 '가학적인' 측면에 대해 이야기했다. 하지만 앞에서 권위주의적 성격에 대해 논할 때 보았 듯이, 그 이념 속에는 가학적인 측면만 있는 게 아니라 '피학적인' 측면도 있다. 무력한 존재를 지배하고 싶은 욕망만이 아니라 압도적으로 강한 힘에 복종하여 자아를 없애버리고 싶은 욕망도 존재한다. 나치의 이념과 실제의 이 피학적인 측면은 대중과 관련하여 가장 명백하게 드러난다. 대중은 되풀이해서 듣는다. 개인은 무의미하고 무가치한 존재라고. 따라서 개인은 자신의 무의미함을 인정하고 더 높은 힘 속에 자신을 용해시켜야 한다고. 


지금까지 이 책은 자유의 한 측면을 다루었다. 근대 사회에서 한 때 삶에 의미와 안전을 주었던 모든 유대로부터 해방된 개인이 고립된 상태에서 느끼는 무력감과 불안감에 대해서다. 우리는 개인이 이 고독을 참지 못하는 것을 보아왔다. 고립된 존재로서의 개인은 바깥세상에 비해 철저하게 무력하고, 따라서 바깥세상을 몹시 두려워한다. 그는 고립되어 있기 때문에 세계의 통일성은 적어도 그에게는 깨진 상태이고, 그는 자신의 위치를 확인할 기준점을 잃어버렸다. 따라서 그는 자기 자신과 삶의 의미에 대한 회의에 사로잡히고, 결국은 자신의 행동 지침으로 삼을 수 있는 모든 원칙을 의심하게 된다. 무력감과 회의는 둘 다 삶을 마비시키고, 인간은 살기 위해 자유ㅡ소극적인 자유ㅡ로부터 달아나려고 애쓴다. 그는 새로운 유대 속으로 떠밀려 들어간다. 이 유대는 원초적 유대와는 다르고 권위나 사회 집단의 지배를 받지만, 사람은 그것과 완전히 분리될 수는 없다. 자유에서 도피해도 그가 잃어버린 안전은 되돌아오지 않고, 그가 자신의 자아를 자기와는 별개의 실체로서 잊어버리도록 도와줄 뿐이다. 그는 개체적 자아의 본래 모습을 희생하는 대가를 치르고 허술하지만 새로운 안전을 발견한다. 그는 혼자라는 것을 참을 수 없기 때문에 차라리 자아를 잃는 쪽을 택한다. 그리하여 자유는ㅡ'무엇으로부터의 자유'와 마찬가지로ㅡ새로운 유대로 이어진다.
우리의 분석은 자유에서 새로운 의존으로 이어지는 불가피한 순환이 존재한다는 결론을 내릴 것인가? 모든 원초적 유대로부터의 자유는 개인을 너무 고독하고 고립된 존재로 만들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는 새로운 유대 속으로 도피해야 할 것인가? '독립'은 '고립'과 같고 자유는 두려움과 같은 것일까? 혹은 개인이 독립된 자아로 존재하지만 고립되지는 않고 세상이나 타인이나 자연과 결합한 상태로 남아 있는 적극적인 자유라는 상태가 존재할까?
우리는 긍정적인 대답이 있다고 믿는다. 자유가 성장하는 과정은 악순환을 이루지 않고, 인간은 자유로우면서도 외롭지 않을 수 있고, 비판적이지만 의심으로 가득 차지 않을 수도 있고, 독립적이지만 인류를 구성하는, 없어서는 안 될 일부일 수도 있다고 믿는다. 인간은 자신의 자아를 실현하고 자기 자신이 됨으로써 이 적극적인 자유를 얻을 수 있다. 그러면 자아의 실현이란 무엇인가? 관념론 철학자들은 지적인 통찰을 통해서만 자아를 실현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들은 인간의 본성을 이성이 억누르고 감시할 수 있도록 인격을 분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렇게 분할한 결과 인간의 감정생활만이 아니라 지적 능력까지도 제대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성은 자신의 죄수인 본성을 감시하는 간수가 됨으로써 그 자신도 죄수가 되어버렸다. 그리하여 인격의 두 측면인 이성과 감정은 둘 다 절름발이가 되었다. 자아의 실현은 사고 작용만 이 아니라 인격 전체의 실현을 통해, 즉 감정적 잠재력과 지적 잠재력을 적극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이루어진다고 우리는 믿는다. 이 잠재력은 모든 사람에게 존재하지만, 겉으로 표현되는 만큼만 현실이 된다. 다시 말하면 '적극적인 자유는 통합된 인격의 자발적인 활동에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