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기록

급류ㅣ정대건ㅣ또 하나의 역주행 소설

기로기 2025. 2. 15. 19:02

소설의 표지를 보고 저절로 떠올랐던 예상과 너무 다른 이야기라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힘든 이 세상에서 나는 너밖에 없고 너는 나밖에 없어, 라는 거의 판타지급 설정을 가졌다는 점에서 <구의 증명> 감성이랑 비슷했고 그게 이 소설의 인기요인인가? (리뷰를 찾아보니 연령대가 낮은 층이 많은 것 같긴 함) 놀랍게도 작가는 <GV 빌런 고태경>을 쓰신 분이었고 나는 그 소설이 더 취향에 맞았던 걸로 기억한다.

 

너무 큰 상처를 같이 겪은 사람들은 남은 일생을 서로 안 보고 살기도 하더라. 같이 있으면 그 기억에서 벗어날 수 없고, 그것이 갈등의 씨앗이 되기도 하고. 세상에 안 보고 살아야 더 좋은 인연이 왜 없겠어.

 

너무나 이기적이고 무책임한 사랑놀이 때문에 애들이 저렇게 상처받은 채 살아가야 했다니.. 내겐 그 두 어른에 대한 연민의 감정이 전혀 생기지 않았다. 소설에서 인상깊었던 구절을 정리하면서 보니 도담이 받은 상처가 얼마나 큰지 다시 느껴져서 더더욱. 

 

친구의 감상이 궁금해지는 소설이다.

 

 

 

"너 소용돌이에 빠지면 어떻게 해야 하는 줄 알아?" 도담이 해솔을 보며 물었다. "어떻게 해야 되는데?" "수면에서 나오려 하지 말고 숨 참고 밑바닥까지 잠수해서 빠져나와야 돼." (바닥을 쳐야 비로소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말인 것만 같아서 의미심장했다.)

도담은 온몸의 피가 머리 쪽으로 역류하는 기분이었다. 심장이 거세게 뛰었고 관자놀이에 맥박이 펄떡이는 게 느껴졌다. 항상 안전에 대해 엄격하게 훈육하던 창석이었다. 자연 앞에선 자만해선 안 된다고. 자연이 가장 무서운 거라고. 그런 사람이 비 오는 밤에 어두컴컴한 계곡에서 술을 마시며 물놀이를 하고 있었다. 저렇게 위험하게. 두 사람은 비를 맞으며 한 몸처럼 포개졌다. (인간이 얼마나 위선적 혹은 비이성적인지 보여주는 대목 같음)

어른들이 쟤는 액운이 꼈으니 어울리지 말라고 했을까. 나는 저들에게 아주 불행한 사람으로 기억되겠지. 그들의 삶이 힘들 때마다 적어도 내게는 저렇게 끔찍한 일은 벌어지지 않았잖아, 나는 행복한 거야, 라고 위안 삼을 만한 불행의 표본이 되었겠지. (이것도 인간의 끔찍함을 잘 보여줌)

사람들은 그들이 기대한 만큼 비극을 겪은 사람이 충분히 망가지지 않으면 일부러 망가뜨리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소나기가 쏟아졌다. 갑작스러운 비에 우산 없는 남학생들이 저들끼리 욕설을 뱉고 웃으며 뛰어갔다. 그들이 어리게 느껴졌다. 그들과 비슷한 나이인 태준은 남들처럼 추억을 만들고 웃고 즐기는 연애를 바랄 뿐이었다. 상대방의 지옥을 짊어진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연애라는 건 상대방이라는 책을 읽는 거라고, 그렇게 두 배의 시간을 살 수 있는 거라고, 태준은 말한 적이 있었다. 도담은 자신이 펼치고 싶지 않은 책, 끝까지 읽고 싶지 않은 책처럼 느껴졌다. 전부 말뿐이었다. 그렇게 좋아하지도 않은 태준에게 자신이 그토록 상처를 받은 게 놀라웠다.

도담이 자신을 망가뜨리려 하자 그 일을 도와줄 사람들은 넘쳐났다. 상처 입은 사람의 냄새는 애써 덮고 감추어도 눈빛에서, 걸음걸이에서,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았다. 도담이 외롭다는 것을 감지하고 남자들은 어디선가 나타나 접근했다. 시체를 뜯어 먹으려고 강바닥에 숨어 있다 모여드는 다슬기처럼. (<더 글로리>에서 문동은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너네는 나같은 애를 참 잘 찾아낸다는 식의 말.)

도담은 어디에서도 사랑이라는 말을 듣기 싫었다. 누가 사랑이라는 치사한 말을 발명했을까. 자신조차 설명하기 어려운 마음을 두 글자로 퉁치는 것처럼, 사기처럼, 기만처럼 느껴졌다.

평소 예지는 사랑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이라고 말하는 사랑 예찬론자였다. 도담은 예지가 그렇게 사랑을 최고로 생각할 수 있는 건 아직 사랑에 충분히 당하지 않아서라고 믿었다. 도담은 불행의 크기를 다이아몬드라도 되는 양 자신의 것과 남의 것을 비교했다. 도담에게는 여전히 자신이 가진 불행이 가장 크고 가장 값졌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게 아무도 바라지 않은 일이었다는 걸, 뜻밖의 사고였다는 걸 받아들여야 한다는 거야. (<사고는 없다>라는 책을 읽고 있기 때문에 이 문장에는 동의할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