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량한 차별주의자>를 감명 깊게 읽었다. 저자의 신간이 나와 리스트에 담아두었고 드디어 읽어보았다. 역시나 글을 너무나 잘 쓰신다. 그리고 본인의 논리를 전개함에 있어 '독'을 품고 있지 않아서 좋았다.
저자가 꿈꾸는 세상은 내가 꿈꾸는 세상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날이 오려면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하지만 지금 여기까지 이미 먼 길을 왔다고도 생각하기에, 희망이 있다. 훗날, '예전에는 이러이러했잖아. 말이 안 됐지.'라고 얘기할 날이 올 거다. 정상 가족 중심주의라는 틀에 박힌 가족각본에서 벗어나 더 넓고 다양한 세상을 받아들이는 사회가 되길.
또한 초고령화 사회로의 이행에 따라 돌봄노동은 급증할 수밖에 없고 이를 계속 가족의 테두리 안에서 모두 해결하게끔 둘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사회적 정책과 논의가 따라주어야 할 것 같은데, 과연...?
57)남성이 재산을 거의 독점하던 시절, 결혼이란 경계는 "어느 자녀가 상속인이 되어 재산상속의 법적 자격을 가질지 결정하는 효율적인 수단"이 될 수 있었다. 남성에게는 자식이 생겨도 상속이나 양육에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는 바깥 영역이 생기는 것이다. 그럼 남성이 책임지는 자녀를 한정해야 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결혼은 남녀가 상호 정조의 서약을 하는 것으로 생각되지만, 역사적으로 정조의 의무는 여성에게만 적용되었다. 한국에서도 오랫동안 축첩제가 인정되었듯이, 일부일처제라고 해도 남성이 결혼 밖에서 출생한 자녀에 대해 의무를 지우지 않음으로써 남성은 결혼 밖에서의 성관계에 자유로울 수 있었다. 결혼 안과 밖의 자녀를 구분하는 제도는 "남성이 자신과 자신의 (공식적) 가족에게 미치는 부정적인 재정적 결과를 피하면서도 성적 자유를 유지"하는 데 유용했다.
91)(장애인의 출산을 반대하는 흔한 인식을 얘기하면서) 그리하여 실제로 닥치는 불행은 오롯이 출산을 '선택'한 개인의 책임으로 돌린다. 결국 그렇게 차별을 보존하고 전승하며 어떤 집단의 미래를 영구적으로 불행하게 만드는 행위에 (의도치 않게) 가담한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어떤 사람들을 이 땅에 오지 못하게 막는 행위는 얼마나 폭력적인가? 뒤집어 생각하면, 아동의 인생을 생각해 부모가 출산을 포기해야 한다는 말은, 사회가 변화를 도모하지 않겠다는 변명일 수 있다. 반대로, 부모가 출산에 대한 결정을 자유롭게 내릴 수 있는 사회는 이미 아동에게도 좋은 사회일 것이다. 태어나는 아이에게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사회라면, 이미 불합리한 차별이 없는 세상이란 뜻일 테니 말이다. 우리는 누군가의 출산을 막을 것이 아니라 출생으로 등장하는 예측 불가한 구성원을 위해 변화하며 공동체를 형성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래서 임신, 출산이 국가적 수단이 아니라 국가가 보장해야 할 개인의 권리임을 확인하는 일이 중요하다. 개인은 임신, 출산에 관해 자유롭고 책임 있게 결정할 권리를 지니며, 국가는 모든 사람이 이 권리를 향유하고 건강을 누릴 수 있도록 보장할 의무가 있다. 이를 재생산 권리 reproductive rights 라고 한다. (정말 맞는 말이지만 너무나 이상적이라 실현이 아주 아주 어려울 것 같다... 벌써부터 역차별 소리가 들린다.)
140)(청소년의 임신에 대한 부모의 분노를 얘기하다가) 알게 모르게 당연하다고 믿어온 오래된 가족질서에서 벗어나는 상황에서 사람들에게 불안의 감정이 덮치는 건 사실이다. 이러한 분노와 배척은 가족제도로부터의 일탈을 통제하는 무력이고, 궁극적으로 가부장제를 유지시키는 정교한 톱니바퀴다. 그러니 단순히 여성의 교육과 고용 증진으로 가부장제가 간단히 사라질 것이라 생각하면 서툰 기대가 아닐까. 가부장제는 가족이 가족에게 행하는 성적인 통제와 잔인한 폭력을 통해서도 연명하고 있다.
165)있는 자가 가족제도를 통해 계층을 세습하는 동안, 없는 자는 가족생활 자체가 어려운 상태가 된다. 누가 자신의 삶과 무관하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지금처럼 사회가 급변하고 가족의 불안정성이 커지는 시대에, 축적된 재산이 얼마나 많아야 가족이라는 소박한 행복을 꿈꿀 수 있을까? 그래서 더더욱 누군가는 좋은 스펙의 결혼을 좇아 자구책을 찾기도 하겠지만 그러는 동안 가족 불평등은 더 심각해진다.
182)(판결 비교) 독일은 공문서상 개인의 성별이 변해도 법적으로 배우자나 양육자-자식 관계가 변치 않도록 보호하는 방식을 채택했고, 한국은 공문서상 성별을 바꿀 수 없도록 하는 방법을 채택했다. 독일은 성별에 관한 개인의 자기결정권을 보장하고 실제 가족생활을 보호하는 일을 중요하게 생각했지만, 한국은 가족관계등록부에 '보이는' 가족관계를 '정상'으로 만드는 일을 중요하게 여겼다.
193)2007년 차별금지법에 대한 반대구호로 등장했다고 소개한 "며느리가 남자라니!"라는 외침은, 단지 성소수자에 대한 반대가 아니었다. 동성애, 그리고 동성결혼을 반대한다는 것은, 곧 사람이라면 모름지기 이성과 결혼하고 자녀를 출산해야 한다는 메시지이고, 여성과 남성에게는 서로 다른 역할이 있음을 상기시키는 일이었다. 말하자면 성소수자 반대운동은 가족각본을 절대적인 도덕률로 신앙화하는 작업이자, 가족각본에서 벗어난 삶의 형태를 부정하고 가부장적 질서를 유지시키는 핵심 담론이었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가 생각남)
199)한국은 사회보장에 필요한 비용을 아끼고 가족에게 돌봄의 책임을 맡김으로써, 노동생산성을 극대화하는 데 주력해왔다. 그렇게 기업 역시 오랜 시간 돌봄의 책임을 피하며 이익을 누렸다. 돌봄을 '사적인' 가족의 문제로 분리시키고 여성의 보이지 않는 노동에 의지한 결과, 기업은 돌봄에 관해 신경쓰지 않고 노동자의 노동력을 한껏 사용할 수 있었따. 기업은 돌봄의 책임과 무관하다는 생각에서, 여성을 결혼과 육아를 이유로 차별하고 남성에게 과도한 노동시간을 요구했다.
210)한국사회에서 경제, 국방, 교육 등 다른 의제보다 가족을 덜 중요하게 다루는 관념 자체가 말해주는 현실이 있다. 가족은 여전히 국가를 위해 유용한 인력을 생산하는 수단이며, 헌법이 요구하는 가족생활의 보장은 아직도 국가의 목표가 아니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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