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기록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ㅣ최은영ㅣ섬세한 감수성과 감탄이 나오는 표현

기로기 2023. 8. 19. 23:38

역시 이 작가는 사람이 가까워졌다가 멀어지는 그 정서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

애정도 순도 100%의 애정이 아니라 애증을 잘 표현하고,

애정만으로 어떻게 안 되는 것, 견뎌지지 않는 것들이 있다는 걸 알려주는 것 같다.

처연함도 깔려 있다.

 

그리고 특정 부류의 인간들에게 혐오감을 많이 느껴본 것 같다.

특히 생각 없이 말을 내뱉어 상처를 주는 무례한 사람들.

 

이 책에 나온 남자 어른은 한 작품을 제외하면 폭력적이거나 무능하거나 가족에게 무심하거나...

그런 경우가 많은 것도 사실이고 그걸 소설로 그려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작가가 여성과 남성이 화합하고 연대하는 글 또한 써주길 바라게 된다.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젊은작가상 수상집에서 읽었던 작품이다. 

'빛나는 젊은 강사였던 그녀가 더이상 내가 찾을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는 표현이 서글펐다.

씁쓸했다.

 

15)나는 재미있는 사람도, 웃기는 사람도 아니었다. 누군가에게 나는 비정규직 은행원이었고, 누군가에게는 다이어트가 필요한 어린 여자애였으며, 누군가에게는 일을 처리해줄 기계였고, 누군가에게는 하소연을 들어줄 사람이었고, 누군가에게는 감정도, 생각도, 느낌도, 자기만의 언어도 없는, 반격할 힘도 없는 인형이었으니까. 

 

24)당황한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그가 내 말을 끊었을 때, 그리고 내 발언을 평가절하했을 때 약간 무안했을 뿐 별다른 감정은 들지 않았다. 누군가가 내 말을 끊고, 내 의견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상황이 내게는 익숙했다.

 

<몫>

동일집단, 친구 사이의 인정욕구가 잘 드러난다. 은근한 질투, 열등감, 애정이 뒤섞인.

슬펐다, 그렇게 똑똑했던 여자 셋 중 하나는 계속 써서 기자가 되지만, 하나는 남편 커리어 때문에 경단녀가 되어 미국에 따라가고, 나머지 하나는 제일 재능 있었는데 절필하고 활동가 하다가 요절하고.. 재능이 뛰어났던 이 친구는 글을 계속 썼어야 했다. 내가 희영이 친구였으면 꾸준히 설득했을 것 같은데. 하지만 희영이는 그런 사람이었던 거라고. 

이 작가는 절대 모든 희망의 문을 활짝 열어놓지 않는다. 

 

<일년>

이 이야기에서는 대졸 공채와 고졸 특채 구별짓기, 정규직과 인턴 구별짓기, 회사생활하면서 진심이 아닌데도 원만한 관계를 위해 적당히 뱉어야 하는 말들, 지어야 하는 표정 같은 게 잘 드러났다.

 

마음이 통하고 대화가 잘 통하는 사람을 만나는 건 드문 일이다. 나였다면 다희를 다시 만났을 때 연락처 교환했을 거 같은데... 역시 이 작가 세계에선 안 그런다.

 

115)그녀는 다희에게 서운함을 느끼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서운하다는 감정에는 폭력적인 데가 있었으니까. 넌 내 뜻대로 반응해야 해, 라는 마음. 서운함은 원망보다는 옅고 미움보다는 직접적이지 않지만, 그런 감정들과 아주 가까이 붙어 있었다.

 

120)다희가 더 깊은 이야기를 할까 한편으로는 두려웠다는 말도. 사람들은 때로 누군가에게 진심을 털어놓고는 상대가 자신의 진심을 들었다는 이유 때문에 상대를 증오하기도 하니까.  

 

<답신>

이건 부글부글 숨막히게 열 받으면서 읽었다.

배우자를 잘못 만나 인생을 조지는 이야기는 정말 정말 괴롭다.

여기서 언니는 재판에서 위증을 해서 남편 편을 들고 동생을 불리하게 만드는 선택을 한다.

역시 배우자를 잘못 만나 가스라이팅 당하고 그렇게 사는 인간은 자기를 진심으로 위해주는 사람과 멀어질 수밖에 없다.

끔찍한 이야기였다.

 

<파종>

상실감, 그리움. 긍정적인 남성상이 나오는 얘기가 드문 작가인데 여기서 삼촌이 좋은 사람으로 나왔다.

맨 뒤의 작가의 말을 읽어보니 아버지가 투영된 이야기인 듯했다.

 

<이모에게>

남아선호사상이 강했던 시대 임신기계 취급을 받아야 했던 여성들이 겪은 고통. 어찌 감히 헤아릴까 싶을 정도로 이모가 너무 너무 짠했다. 

 

그치만 이모가 이유도 알려주지 않은 채 이사를 갔어도 이모를 찾아가고 만나고 할 수 있었을 텐데, 상처 받은 마음에 7년이나 이모를 보지 않다니... 이모 마음이 어땠겠어? 그런 게 내가 이 작가의 정서랑 안 맞는 부분이다. 굉장히 여리고 상처받기 쉬운 인물이 많음. 

 

239)"저건 건물주 문제야. 계단이 뭐라고 어르신이 일일이 닦게 하나..." 아빠는 혀를 차며 말했다. 집안에서는 숟가락 하나도 자기 손으로 챙기지 않으면서, 엄마나 이모가 집에 없으면 밥통에 밥이 있어도 상을 차리지 않으면서, 늘 누군가 닦아놓은 변기를 사용하면서 아빠는 그렇게 말했다. 쪼그리고 앉아 바닥을 걸레질하는 이모를 멀뚱히 바라보던 아빠의 얼굴이 떠올라서 나는 마음이 차가워졌다. (위선자. 이런 사람 상당히 많을 거라 본다.)

 

247)훈련을 두려워하고 힘겨워하는 동기들의 모습이 거슬리기도 했다. 나는 아무데서나 눈물을 보이고 하소연하는 동기들을 멀리했다. 그런 나약함이 꼭 내게 전염될 것 같아서 두려웠다. 나는 경제적으로나 감정적으로나 누구에게도 결코 아쉬운 소리를 하지 않고 완전히 독립해야 했으며 내가 선택한 일에 대해서는 백 퍼센트 책임을 질 수 있는 어른이 되어야 했다. 그래야만 겨우 나를 미워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255)싫어하는 것들의 목록만 늘려가는 인간이 될까봐, 자기 상처에 매몰되어 다른 사람의 상처는 무시하고 별것도 아니라고 얕잡아 보는 편협하고 어두운 인간이 될까봐 겁이 났다는 사실을.

 

<사라지는, 사라지지 않는>

'기남'이 할머니라는 사실이 나올 때부터 이름 뜻이 아들을 기대한답시고 지은 이름이며 불쌍한 할머니겠구나 싶었다.

역시나 그랬다. 슬픈 이야기였다.

첫째가 친딸이 아니었다니. 둘째는 엄마한테 대체 왜 저럴까. 

영화 <미나리>가 생각나기도 했고.

 

309)기남은 그의 말을 다 믿었다. 그가 진실했기에 자신 또한 진실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기남은 그의 질문에 모두 정직하게 답했다. 마음을 열어 자기 상처를 보여준 대가로 그가 일평생 그 사실을 들먹이며 자신의 약점으로 삼을 줄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