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기록

문과 남자의 과학 공부ㅣ유시민ㅣ과학을 공부하자

기로기 2024. 7. 3. 15:27

저자의 회고록 또는 일기장 같은 내용이 많아서 아쉬움이 들었다.

과학이라는 팩트에 저자 본인의 감상이 굉장히 많이 붙어 있어서 오히려 더 읽기 어려웠다.

같이 읽은 친구들도 비슷하게 느낀 것 같았다.

하지만 오랜 인문학자로서의 삶에서 반성할 점을 찾고 끊임없이 공부하고자 하는 저자의 자세는 배우고 싶다.

팩트와 도덕을 혼동하지 말자는 것과 학문 간 통섭이 중요하다는 것도 새겨들었다. 

작가로서의 유시민을 볼 때 정치인으로서의 그의 삶을 계속 오버랩시키지 않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다. 

요즘 과학에 더 흥미를 가지고 과학서를 더 찾게 된다.

 

 

나는 인문학자가 과학을 공부하지 않고 과학자들이 찾아낸 사실을 활용하지 않는 데서 인문학의 위기가 싹텄다고 본다.

 

우파는 진화론을 오독하고 악용해서 사회다윈주의와 우생학을 만들었다. 좌파는 다윈과 다윈주의를 싸잡아 배척했다. 지금도 적지 않은 인문학자가 다윈주의를 혐오한다.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나는 인문학이 준 이 질문에 오랫동안 대답하지 못했다. 생물학을 들여다보고서야 뻔한 답이 있는데도 모르고 살았음을 알았다. '우리의 삶에 주어진 의미는 없다.' 주어져 있지 않기 때문에 찾지 못한다. 남한테 찾아 달라고 할 수도 없다. 삶의 의미는 각자 만들어야 한다. '내 인생에 나는 어떤 의미를 부여할까?' '어떤 의미로 내 삶을 채울까?' 이것이 과학적으로 옳은 질문이다. 그러나 과학은 그런 것을 연구하지 않는다. 질문은 과학적으로 하되 답을 찾으려면 인문학을 소환해야 한다. 그 질문에 대답하는 것이 인문학의 존재 이유이자 목적이다.

 

사회제도는 변하기 어려운 인간의 생물학적 본성과 충돌하면 오래 지속하지 못한다. 사유재산을 폐지한 게 대표적이다. 그게 도덕적으로 나쁜 정책이었다는 뜻이 아니다. 도덕적 평가와 무관하게, 사유재산 제도를 폐지한 사회체제는 장기 존속할 수 없다는 말이다. 도킨스가 <이기적 유전자>에 소개한 동물 개체군의 행동 패턴 분석 모델을 보고 더 분명하게 알았다. (<경제학이 필요한 순간>에도 나오는 얘기다.)

 

우리 삶에는 도덕과 미학이 필요하다. 그렇지만 사실은 사실 그대로 알면서 선과 미를 추구하자. 사실을 도덕으로 착각하지도 말고 도덕으로 사실을 덮지도 말자.

 

분야를 가리지 않고 통섭을 행하기 때문에 과학은 극적으로 발전했고 사회과학은 통섭을 거부하기 때문에 발전이 더디다는 말이다. 사회과학을 인문학으로 바꾸어도 이 진단은 그대로 들어맞는다. 과격하지만 옳은 지적이다.

 

불교는 인격신을 섬기지 않는다는 점에서 기독교나 이슬람과 다르다. 우주의 모든 것에 신성이 깃들어 있다고 보는 범신론, 자연법칙을 신의 자리에 올려두는 이신론에 가깝다. 석가모니는 종교를 창시하지 않았다. '스스로 깨달은 사람'이었을 뿐이다. 그는 존재의 이유와 삶의 의미를 탐색한 끝에 인간 이성과 자연법칙 말고는 모든 것이 헛되다는 결론에 도달한 철학자였다. 깨닫지 못한 사람들이 그를 내세워 종교를 만들었다. 범신론과 이신론에 가까운 종교는 다른 종교나 과학과 충돌을 일으키지 않는다.

 

'자등명 법등명', 그가 죽기 전에 남겼다는 말을 나는 좋아한다. 자기 자신을 등불로 삼는 것은 스스로 자신의 삶에 의미를 부여한다는 뜻이다. 법(진리)을 등불로 삼는 것은 관습과 미신이 아니라 이성의 힘으로 산다는 뜻이다. 세상에 끌려다니지 말고 이성적으로 생각하면서 자신이 원하는 삶을 옳다고 믿는 방식으로 살라 했으니 석가모니는 분명 깨달은 사람이었다.

 

뜨거운 커피는 마시는 동안 미지근해진다. 아무리 정리해도 집은 어질러진다. 화를 낼 필요가 없고 화내봤자 소용도 없다. '엔트로피 법칙 때문이다!' 노화와 죽음을 면해 보겠다고 발버둥치는 사람들을 보면 안타깝고 딱하다. 보양식 섭취부터 혈액 교체와 세포 치료를 거쳐 유전자 조작과 장기 이식까지 돈이 있으면 무엇이든 한다. (<역노화>를 읽고 뭐라고 하실지 궁금하다.)

 

우리 자신을 이해하려면 과학과 인문학을 다 공부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