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기록/여성

직업을 때려치운 여자들ㅣ이슬기 서현주ㅣ나의 문제의식을 책으로 만들어준 사람들

기로기 2024. 3. 13. 21:09

몇 달 전 친구가 '부자인 친구를 둔 것과 가정의 소득이 직업 선택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연구' 이런 주제의 영상을 보내줘서 얘기를 나눈 적이 있다. 관심 있는 주제다 보니 많은 의견이 떠올랐는데 그 중의 일부가 다음과 같은 문제제기였다.

 

해당 영상은 '왜 가난한 아이가 돈을 많이 벌기 어려운 직업을 선택하는가?'에 대하여 미국 명문사립대 내의 재학생 간 비교를 하지만, 내가 고등학생 때부터 느꼈던 건 비수도권의 여자 아이들 중 참 똑똑한데도 꿈이나 그릇이 작고 쉽게 만족하는 아이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선택하는 직업도 꽤나 한정적이었는데, 교사 공무원 공공기관. 이러한 직업이 나쁘다는 의미가 아니라, 성적이 매우 우수하고 똑똑한 아이들인데도 직업을 선택할 때 오직! 직업안정성만을 따지고 보수적으로 보는 시각을 당연하게 생각하더라는 거였다. 취업 잘 되는 것만 생각하고 전공을 정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니 똑똑해도 직업으로 돈을 많이 벌기가 힘들다. 그릇(야심)은 시험을 잘 치는 공부머리와는 무관하게, 부모나 주변 경험을 통해 키우게 되는 거니까. 그게 그 영상이 말하는 부자 친구의 실효성 입증이기도 했다. 가난한 집 아이는 부잣집에 비하면 생계의 문제로 인해 실패는 게 허용이 안 되니 안정성을 추구하게 되는 경향이 분명 존재할 거라 생각한다. 멀리 유학을 가면 학비 뿐 아니라 생활비도 많이 든다는 점에서 학벌의 문제에서도 가성비를 따지는 것도 있고. 멀리 가야 할 필요성 자체를 못 느끼거나, 부모가 야심이 크지 않은 이상 자녀에게 원하는 바도 그런 ’평생 안정적일 직업‘ 경향이 남아있기도 할 것이다. 아직도 지방에서는 ‘여자 직업=교사 & 공무원=최고’라고 생각하는 분위기가 어르신들 사이엔 남아있는 것을 느꼈다. ‘평생 안정’이라는 전제 자체가 성립 안 한다고 난 생각하는데.

 

그런데 얼마 전 서점에서 <직업을 때려치운 여자들>이라는 흥미로운 제목을 가진 책을 만났다. 이때까지만 해도 탈직장이 더 이상 놀랄 일이 아니게 된 요즘 젊은 청년들의 얘기인가 보다 싶어, 읽어봐야겠다 생각하고 집에 와서 정보를 더 찾아봤는데, 놀랍게도! 단순한 탈직장 이야기가 아니라, 내가 몇 달 전 짚었던 맥락과 똑같은 문제의식을 가지고 여성 수 십 명의 인터뷰를 거쳐 만든 책이었다. 이런 책이 존재하다니! 10대 여자 아이들의 직업 선택에 대한 가정과 사회적 압력에 관한 책이 나왔다니!

 

읽으면서 끄덕끄덕을 연발했다. 소위 '여자가 하기 좋은 직업(이라고 어른들과 사회가 가스라이팅한) 직업'에 종사한 여성 수 십 명의 인터뷰를 거쳐 책으로 정리한 내용이다. 나의 친한 친구 중에 교사, 간호사, 승무원, 공무원, 보육교사가 다 있기 때문에 더 와닿는 이야기일 수밖에 없었다. (해당 직업을 이미 그만뒀거나, 그만두고 싶을 만큼 정신적으로 심각한 상태에 처했거나, 언젠가는 그만두고 싶어하거나, 그만뒀다가 다시 돌아가는 등 다양한데 직업 만족도가 높은 경우는 보지 못했다.)

 

'일'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고, 교권 침해와 돌봄 노동까지 아우른다. 얼마 전 읽은 <인생샷 뒤의 여자들> 책도 그렇고 똑똑한 여성 청년들이 우리의 이야기와 현실을 이렇게 깊이 있게 다루는 것이 너무 멋지고 고마운 마음이 든다. 

 

남들이 좋다고 하는 거, 그 당시에 유망하다고 난리인 것을 선택하면 시간이 지나서 어차피 상황이 바뀌는 시대를 목도하게 된다. 지금의 의대 과열선호 현상도 언제까지나 예외일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인간사의 많은 일에 사이클이 있다. 평생 안정적인 직업을 찾는 게 답이 아니다. 그런 건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받아들이는 게 좋다. 성장은 느려진 반면 변화는 너무나 빠르다. 그냥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후회 없이 하고 살자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어떤 성별이나 환경을 이유로 (그 사람을 위한답시고) 적성은 고려도 안 하고 그의 세계를 좁히는 것, 법으로 범죄라고 정한 건 아니지만 정말 정말 나쁜 행위다. 이런 식의 구시대적 발상이 여자들 스스로 돈이 많아지기 힘든 사회구조적 문제로도 이어진다. 안정이란 허울에 기대어 도전을 못 하게 만드니까. 시야를 좁혀버리니까. 고민 끝에 탈직장을 선택하고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고 있는 모든 사람, 그리고 지금도 어디선가 탈직장을 고민 중일 모든 사람을 응원한다. 여성들이 어디든 갈 수 있고,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진심으로 생각하고 행동하길. 배우고, 나아가고, 자신을 사랑하길.

 

 

 

노파심에 얹는 얘기 하나. 여기서 여초 직업의 대명사로 언급되는 교사, 간호사, 승무원, 방송작가를 폄하할 생각이, 우리는 전혀 없다. 교사와 간호사와 승무원과 방송작가들 모두가 직업을 사회적 압박에 의해 피동적으로 택했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단, 여성들이 가진 각양각색의 꿈이 왜 몇 안 되는 직업들로 좁혀져야 했는지, 그것은 정말로 여성들에게 좋은 직업이었는지는 따져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여자 하기 좋은 직업'이나 '일등 신붓감 직업' 등의 성차별적인 언사를 떠나 '사람으로서 하기 좋은 직업'을 만들기 위해서라도.

 

42)도도는 당시 의대나 포항공대에 진학할 수 있는 뛰어난 성적을 내었고, 본인도 그중의 한 곳으로 진학을 원했다. 하지만 어른들에게는 여성이 의대나 포항공대를 간다는 것에 대한 인식 자체가 없었다고 한다. "담임 선생님과 부모님이, 여자니까 사범대를 권유한 거고, 저는 오케이 한 거죠." 다른 전공으로 뻗어나갈 수 있는 가능성이 충분했는데도 어른들의 뜻을 거스르지 못해 도도는 수학교사가 되었다.

 

56)물론 서울로 유학하는 게 벼슬도 아니고, 서울에 있는 대학이 최고도 아니며, 굳이 돈이 많이 드는 서울로 올 필요도 없다. 그러나 보다 인프라가 좋은 서울로 오고픈 욕망, 보다 다양한 직업 세계에 몸담고 싶은 욕망을 '여자 하기 좋은 직업'이라는 이름으로 꺾는 것, 그것이 여성에게만 효용을 발휘하는 것이 문제다.

 

76)그러나 오늘을 사는 여자들은, '여자 하기 좋은 직업'이라는 말에 적극 반기를 든다. 이들 직업이 사회가 요구하는 여성상인 '육아를 병행하며 벌이도 괜찮은 워킹맘'이라는 프레이밍에 걸맞은 직업으로 정체화됐다는 것이다. 12년 차 초등학교 교사인 지은(34)은 "교사는 일등 신붓감이라는 말 자체가 정상 가족을 염두에 두고 여성 생애가 결혼-출산-육아 등으로 딱 이미 정해져 있다는 생각을 내포하고 있다는 게 너무 소름 끼친다"라고 했다. 

 

142)우리는 교권 침해에 대해 파고들면서 이것은 단순히 한 직업군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결론에 다다르게 되었다. 교육을 소비자주의로 바라보는 시각, 신자유주의 자본주의에 입각한 물질 만능주의, 초등 의대반으로 표상되는 엘리트주의, 여성에 대한 차별 및 성 역할 고정관념, 공동체적 의식 대신 팽배하는 이기주의까지. 

 

151)최소한의 간호사만 투입해 최대로 많은 환자를 보게 하는 시스템하에서, 태움은 자신을 억압하는 근본적 원인이 아닌 자신보다 약해 보이는 자를 향한 '수평 폭력'의 형태로 자행된다는 것이다. 그는 이를 두고 "문제의 원인을 정면으로 응시할 용기는 없기 때문에 약한 이에게 본인의 불만을 투사하는 비열한 폭력"이라고 말한다. 태움 가해자에게 면죄부를 주지 않으면서도, 태움을 양산하는 병원 내 불합리한 구조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