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훈 기자님 책에서 언급되어 읽게 된 책이다. 남성 교사인 저자가 어떻게 여성주의를 접했고 학교에서 남학생들에게 어떻게 가르치는지가 나오는 책이라 해서 기대를 갖고 읽어보았다.
저자는 남자 시각에서 한국에서 살면서 겪은 일상(가정생활, 학교생활, 직장생활)을 토대로 여성주의에 대해 써서 매우 좋았다.
읽으면서 끄덕끄덕 공감하게 되는 구절이 한 두 군데가 아니었다.
200쪽 남짓이라 두껍지도 않고 글씨 가독성도 좋아서 여성주의에 입문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책의 끝에서는 이어서 볼 다른 책들도 잔뜩 추천해주셨다.
얼마 전에 친구와 얘기했던, 내가 보기엔 A=B=C=D로 이어지는 같은 결의 가치가 누군가에게는 어째서 A=B=C이면서 D로는 연결이 안 되는 걸까에 대한 고민에 대해서도 잠깐 나와서 반가웠다.
저자는 청소년기에 이미 가정 내에서 성별 권력을 스스로 체감을 했고, 대학생 때 이미 주변에 굉장히 깨어있는 사람과 공부하고자 하는 사람이 있는 환경이었던 것 같고, 생각이 열려있는 사람으로 느껴졋다.
교사라는 평생 지속되는 직업이고 신상이 알려질 경우 공격의 대상이 되기 쉬움에도 불구하고 자기 소신을 관철한다는 게 멋있었다. 저자에게 커밍아웃을 하거나 깊은 상담을 한 제자들도 있었던 것 같다. 자라나는 청소년기에 이런 시각을 고민하게 해주는 선생님을 더 많은 학생들이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 저자는 이 책 이후 낸 책이 없는데, 또 책을 써주시면 좋겠다.
중년 남성이 멋있으려면? 아내가 있어야 한다. '집사람'의 관심과 돌봄 없이 구멍 난 양말과 밑단 터진 바지를 피할 수 있는 한국 남자는 몇 없다. 깔끔하게 세탁되어 다려진 셔츠를 착용할 수 있는 것도 대부분 아내 덕이다. 중년 여성이 멋있으려면? 남편이 없어야 한다. 아침밥 먹인다고 난리를 피울 것도, 뒷바라지한다고 억척스러울 것도 없다. 가사노동과 감정노동의 부담은 절반 이하로 준다. '500파운드'를 들고 '자기만의 방'에서 비교적 윤택한 삶을 누릴 수 있다. 아내는 남편이 없어야 장수하고 남편은 아내가 있어야 장수한다는 한 대학의 연구 결과를 보면 결혼이라는 이름의 착취 구조에서 누가 가해자이고 누가 피해자인지가 명확해진다. 마치 주인과 노예의 관계처럼 남편은 아내가 있어야 삶에 여유가 생기지만, 아내는 남편이 없어야 삶에 굴곡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남성의 생애 주기에는 이렇다 할 경력단절 요인이 없다. 하지만 여성은 결혼, 출산, 육아를 거치며 많은 수가 직장을 잃는다. 운 좋게 살아남은 사람도 승진에서 탈락하거나 주요 업무에서 배제되는 불이익을 겪는다. 경력단절 여성이 취업할 수 있는 곳은 저임금, 저숙련 일자리가 대부분이다.
자식들을 키워낸 후 많은 어머니들이 우울증에 걸린다. 수십 년 동안 좇았던 삶의 목적이 일시에 사라지자 거대한 허무가, 정체성의 혼란과 자아의 붕괴가 몰려온다. 자아실현의 욕망을 거세당한 어머니들이 자식 교육에 집착하는 것을 비난할 수 있을까. 성취감을 느낄 수 있는 유일한 경로가 자식의 성공뿐이었던 현실에서, 자신의 삶과 자식의 삶을 구분하지 못한다고 그들을 조롱할 수 있을까.
어머니는 어두컴컴한 텅 빈 집에 홀로 앉아 자주 지난 삶을 돌아봤다. 거기서 가엾은 여자아이를 만났다.
자기 인생을 살지 못했던, 고단한 삶에 지친 아이를.
선배들이 연애를 시작했다. 이전부터 잘 어울렸던, 내가 무척 선망하는 사람들이었다. 장난삼아 몇 번 형수님이라고 불렀는데 선배가 정색을 하고 말했다.
"연애 전부터 우리 친한 사이였잖아. 나는 남자 친구를 통해 널 만나지 않았어. 남자의 무엇으로 불리기도 싫고. 별생각 없이 던지는 농담에도 여성을 종속적이고 부차적인 존재로 인식하는 태도가 드러날 수 있어. 그렇게 부르지 말아줘."
나는 바로 사과했다. 누나는 내게 정희진의 《페미니즘의 도전》을 선물하며 '말과 성차별' 부분을 꼭 읽어보라고 했다. 읽는 내내 머리가 어지러운 책이었다.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생각들이 하나둘 붕괴됐다. 다수의 표현이 남성을 인간의 기본값으로 상정하고 있음을, 생각 없이 써왔던 무수한 말들이 실은 차별투성이였음을 깨달았다.
똑똑한 남자 후배는 2학기 들어 페미니즘 학회에 가입했다. 책을 읽고 토론을 하고 대자보를 쓰고 영화를 본 다고 했다. 여성인권영화제에 가려고 수업을 통째로 빠지기도 했다. 당시의 깜냥으로 남자가 페미니즘을 공부하는 걸 이해할 수 없었던 나는 여자도 아닌데 웬 페미니즘이냐는 질문을 던졌다. 후배가 답했다.
"남자니까 잘 모르잖아요, 배워야죠." 각성이 일었다. 후배의 말을 듣고 보니 나도 배워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르니까 배워야죠' 그 말이 한동안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맞는 말이었다. 남의 일이라 무심할 수 있지만 남의 일이라 배울 수도 있었다.
사회적 의제에 진보적이고 다원적인 태도를 보이던 이들이, 약자의 아픔에 공감하며 각계각층의 사람들과 연대하던 이들이 그러고 있었다. 지금껏 이념과 사상을 공유했던 이들이 우리 사회의 여성혐오를 지적하고 페미니즘의 필요성을 말하고 있다면 '믿었던 00마저 그럴 줄 몰랐다'며 구독을 해지하고 지지를 철회할 게 아니라, 어쩌면 내가 틀린 건 아닌지 성찰해보는 게 자연스러운 반응 아닌가. 그게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 그 정도의 자기 객관화도 안 되는 사람들이었나. 그럼 지금껏 보여줬던 문제의식과 비판적 사고는 단지 경제적 기득권에 속하지 않아서 그랬다 말인가.
다른 면에서 진보적 가치를 견지하는 사람이 여성 인권만 탄압하는 경우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마르크스를 모르면서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게 창피한 일이라면, 시몬 드 보부아르를 모르면서 페미니즘을 비판하는 것도 부끄러운 일이 아닐까. 자기가 누리는 무형의 이득은 알기 어렵다지만, 선택적 옹호는 낯 뜨거운 일이다. 일관성을 유지하든가 그냥 입을 다물고 있든가 둘 중 하나만 해야 하지 않을까.
태어날 때부터 투사인 사람은 없다. 미치도록 억울한 일을 당했는데 누구 하나 알아주지 않을 때, 더없이 순했던 사람도 투사가 된다.
똑똑한 사람은 많지만 따뜻하기까지 한 사람은 드물다. 암기력과 이해력이 뛰어난 사람은 많지만 비판적 사고력과 사회문화적 통찰력을 갖춘 사람은 드물다. 페미니즘을 공부하다 보면 나와는 무관한 줄 알았던 아픈 사람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당연한 것이 낯설어지는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된다. 익숙한 것을 다르게 볼 수 있는 능력이 생기고, 개인의 삶을 사회와 역사로 확장할 수 있는 거시적 안목이 싹튼다.
너무 가까이에 있어서 보이지 않는 것, 성차별이란 그런 게 아닐까. 나는 우리 학생들이 <서프러제트>를 보며 자신의 삶을 객관화할 수 있기를, 우리가 사는 시대를 역사의 물줄기 안에서 보기를 바랐다. 그래서 '마지막 광복군' 김준엽 선생이 남긴 말을 칠판에 적는 것으로 그날의 수업을 마쳤다.
"현실에 살지 말고 역사에 살라."
아침밥은 얻어먹고 다니느냐는 말, 정말 많이 들었다. 1년 동안 스무 번도 넘은 것 같다. 처음에는 밥 얻어먹으려고 결혼한 거 아니라고 대답했는데, 길게 이어지는 말들이 귀찮아서 요즘은 그냥 그렇다고 대답하고 만다. 짝꿍한테 저런 말 들어봤냐고 물었더니, 피식 웃으면서 "남편한테 아침밥은 해줘?"라는 소리는 많이 들어봤다고 한다. 아내로 살기 참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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