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음악에 조예는 없지만 마음의 안정을 찾고 싶을 때나 혼자 있을 때 클래식을 곧잘 틀어둔다.
감탄과 경이로움, 감동을 선사하는 피아니스트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삶을 살까?
그것이 궁금해서 피아니스트가 쓴 에세이를 찾다가 손열음 피아니스트의 책을 발견했다.
2015년에 나온 책.
저자가 언급하는 음악을 찾아서 재생해가며 읽는 재미가 있었다. 정말 처음 들어보는 음악가도 너무 많았고, 음악 그 안에서도 클래식의 세계가 깊구나, 세상에는 탐구하려면 탐구할 것이 정말 많구나 싶었다. 예술이란 뭘까 생각해 볼 수도 있었다.
어떤 분야든 그 분야의 최상위에 있는 사람들은 굉장히 똑똑하다고 생각하는데, 이 책을 보며 탑 피아니스트 역시 피아노만 잘 치는 게 아니라 똑똑하고 생각이 깊이 있다는 걸 또 한 번 느꼈다. 8년의 시간이 흘렀으니 또 새로운 책을 내주시기를 기다려야겠다.
음악의 세계를 곧잘 인생에 비유하는 걸 보고, 이 음악가에게는 음악이 곧 인생이겠구나 싶었다.
내 인생은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제가 그렇게 천국과 지옥을 오가던 와중에도, 묵묵히 제 갈 길을 가준 것이 있었더라고요. 바로, 시간이었습니다.
가지고 태어난 탓에 쉽게 논리를 설명하기 힘든 다른 재능들에 비해, 누구에게라도 상세하게 그 원리를 설명해 줄 수 있을 정도로 꼭꼭 씹어 삼킨 능력엔 또 다른 자신감이 붙었다.
이러나저러나 하여튼 답이 없는 것이 분명한데도 스스로의 실체 없는 잣대로 매 연주마다 일희일비하는 게 우리 음악가다. 모든 사람들이 자기 삶에서 그렇듯.
피아노의 제일 밑음인 라부터 제일 윗음인 도까지의 건반 여든여덟 개를 계단으로 만들었다고 생각한다면, 그 새로운 '도'는 맨발로 밟는 느낌이 아니라 빳빳한 담요 같은 것을 깔고 그 위를 밟는 것 같은, 그런 살짝 높은 소리다. 문제는 내게 그 느낌이 예전 A 440Hz의 '도'를 낼 때의 안정된 느낌과는 비할 바 없이 별로였다는 것이다. 나에게 이 '도'는, '도'가 아닌 것 같은데 '도'이긴 하니까 할 수 없이 '도'라고 내는 '도'인 것이다...! 이 껄끄러운 느낌을 진리로 받아들여야 한다니, 처음에는 까마득했다. 그런데 불과 몇 년 후인 지금은 이 음에 익숙해지다 못해 예전에는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맞다고 생각했던 나의 '도'를 떠올리기 힘든 지경에 이르렀다.
"그럼 프로코피예프가 더 좋아, 쇼스타코비치가 더 좋아?" 사실 웃기는 말이다. 슈베르트와 슈만, 프로코피예프와 쇼스타코비치 네 사람 모두 내가 가장 사랑하는 작곡가들이다. 나야말로 누구를 더 좋아한다고 말하기가 힘들다. "그래도 꼭 한 사람만 남겨야 한다면 누굴 택하겠어?" 집요하게 던지는 질문에 프로코피예프라고 답한다면 나는 그 사람이 '미'를 더 추구하는 사람, 쇼스타코비치라고 한다면 '진'에 더 다가가는 사람이라, 선입견을 가지곤 했었다. 실은 아직도 나의 이 섣불렀던 판단이 완전히 틀렸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지금 우리에게 잘 알려진 서양 음악사의 많은 거장들이 공교롭게도 당대에는 그 재능을 충분히 인정받지 못했다. 음악가들뿐인가. 살아 있을 당시에 괄시받던 수많은 선각자, 과학자, 그리고 미술가... 이제 와서야 자신들의 이름이 이토록 칭송의 대상이 되는 것을 보면 그들은 과연 기뻐할지 슬퍼할지. 물론 정반대로, 생전에는 대중의 사랑을 한 몸에 받다가 현대에 와서는 완전히 잊혀진 예술가도 허다하다. 뛰어난 예술작품은 시대를 앞서가기에 어찌 보면 당연한 현상이기도 하고, 예술의 주관성도 그에 한몫을 한다. 그중에서도 음악은 가장 추상적인 예술이니 더욱더 그럴 수밖에 없다. 물론 세간의 평가와 진정한 가치가 늘 같이 가는 것은 아니니 너무 집착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예술이란 모름지기 타인에게 그 감동을 전하지 않으면 그 어떤 심오한 가치를 담고 있다 한들 아무 소용도 없는 것. 허공으로 날아가 소멸되어 버리는 예술이 큰 의미를 가질 수도 없음이 아닌가?
예술이라는 것이 결국 무엇인가?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받는다는 것이 그 자체로 가치일 수는 있을지언정 본질을 판가름하는 기준이 되지는 말아야 한다. 젊은 날의 베토벤이나 슈베르트가 남들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스스로를 비관했더라면 지금 우리가 즐기고 있는 그들의 작품들이 탄생할 수 있었을까? 주목 받는 예술만 좇기보다는 스스로 진정한 가치를 찾아보고자 노력하는 것이야말로, 예술을 사랑하는 자세일 것이다. 물론 그에 앞서 남들에게 인정받는 것보다는 진짜 예술을 하는 것을 목표로 삼은 예술가들이 많이 나와 주어야 하겠지만 말이다.
(콩쿠르 이야기) 이렇게도 모호한 그것, '예술'을 가지고 경쟁을 한다는 것부터가 어불성설일진대 그 과정 자체도 이렇게 아이러니하니, 여러모로 음악 하는 게 쉽지 않은 것만은 확실한 것 같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런 콩쿠르들이 하루 아침에 모두 없어진다면? 그때는 그야말로 실력이고 뭐고, '마케팅 만능주의 사회'의 수혜를 듬뿍 입은 음악가들이 음악계를 완전히 지배하게 되지 않을까. 확실히 있어도 없어도 문제인 콩쿠르.
뵈젠도르퍼, 벡슈타인, 블뤼트너, 볼드윈, 그 외 그로트리안 슈타인베크(스타인웨이 설립자 슈타인베크의 처녀작), 쉼멜 등 각각의 피아노를 고집하는 피아니스트들이 많았다. 그도 그럴 것이 모두가 어떤 것이 더 낫거나 나쁘다 평할 수 없도록 상이한 음색과 터치감을 자랑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오히려 모차르트느 뵈젠도르퍼로, 리스트는 벡슈타인으로, 라흐마니노프는 블뤼트너로, 스트라빈스키는 볼드윈으로, 나머지 작품은 스타인웨이로 각각 다르게 연주하고 싶어 하는 피아니스트들이 더 많았다. 이후 모든 공연장을 스타인웨이가 독식했다지만 100퍼센트 수작업으로 이루어지는 전통적 제조 과정 덕에 여전히 하나하나마다 성격과 소리가 제각각 달랐다. 마치 사람처럼.
러시아에서는 클래식 음악회의 포스터가 마치 대기업의 광고물이나 팝스타의 콘서트만큼이나 크게 길목마다 걸려 있었다. 그걸 보고 음악회에 찾아오는 사람들도 서유럽이나 미국과 비교해 사뭇 다른 부류의 사람들이었다. 유럽이나 미국에서 음악회가 격식과 예우를 갖추는 문화생활이라면 이곳에선 그저 생활이다.
내 짐작에 내가 제일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은 교통수단 안이다. 유럽이면 주로 기차, 미국이면 주로 비행기, 한국이면 주로 자동차라는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한창 이동 중에는 호텔에서보다 더 많은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그런데 내 집 역할을 든든히 해주어야 할 교통수단은 뭐 이리 믿을 게 못 되는지... 기차는 허구헌 날 연착에, 비행기는 허구헌 날 결항...
가족도, 친구도, 전화기도, 악보도, 아무것도 내 곁에 없는데, 나는 무조건 멈추지 말고 계속해야 된다는 그 사실. 그 사실이 더 잔인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그게 '산다는 것'과 너무도 똑같아서다. 인생이라는 무대에 던져진 인간은 누구나 혼자다. 그러니 어쩔 수 없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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