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기록

모순ㅣ양귀자ㅣ옛날 소설인데 지금 통하는 감성, 흥미진진해

기로기 2021. 11. 16. 15:19

너무 재밌다. 글을 너무 잘 쓴다. 최근에 읽은 소설 중에 제일 재밌었다. 전반부에는 가족 얘기가 많고 후반부에는 연애 얘기가 많다. 연애 쪽은 양다리라 좀 난감하다. ‘모순’을 다루기 위한 설정이라 생각한다. 엄마와 이모의 설정이 얼굴이 똑같은 일란성 쌍둥이이듯이.

1998년에 나온 소설인데, 시대 배경이 지금이랑 다를 뿐 올드하지 않다.

하지만 가정폭력을 일삼는 아버지에게 어떤 ‘품위’가 있었다는 묘사라든가, 술이 깬 다음날 아침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잘못을 용서받기 위해 하는 말들이 모두 다 진실이었다는 대목이라든가, 가정폭력 미화 같은 구절은 아무리 소설이라도 용납하기 어렵다.

이 책에는 내가 어렸을 때 느꼈던 정서와 비슷한 정서가 있다. 이모에 대한 내용? 나를 너무 아껴주는 이모가 너보다 내 자식들을 더 사랑해서 미안하다고 하는 장면이라든지 외갓집에 누워서 엄마와 이모의 목소리 속에서 잠을 청한다든지.

반면 이 책에서는 인생에 계획을 세우고 그것을 착착 실행시켜나가는 이모부나 나영규를 다소 부정적으로 그리고 있는데, 내가 이런 유형의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유쾌하진 않았다. 주인공 안진진은 두 남자 김장우와 나영규 사이에서 고민하는데, 읽다 보니 김장우는 주인공의 아빠 같은 사람이고(이성보다 감정에 충실한) 나영규는 이모부 같은 사람(감정보다 이성)인 것 같았다. 일부러 그렇게 설정한 것일 테지. 글에 나오기도 한다. 김장우가 아빠 같다고.

※ 하단 스포주의

 

 

 

이 책의 제목은 <모순>이다. 이모는 누구나 부러워할 법한 삶을 살지만 자살을 택했고, 엄마는 누구나 안타까워할 삶이지만 씩씩하게 생기있게 살아간다. 내가 사랑하는 남자가 아닌 남자와의 결혼을 선택한다.


 

그랬다.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내가 내 삶에 대해 졸렬했다는 것, 나는 이제 인정한다. 지금부터라도 나는 내 생을 유심히 관찰하면서 살아갈 것이다. 되어 가는 대로 놓아두지 않고 적절한 순간, 내 삶의 방향키를 과감하게 돌릴 것이다. 인생은 그냥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전 생애를 걸고라도 탐구하면서 살아야 사는 무엇이다.

진모의 삶은 진모의 것이었고 진진이의 삶은 진진이의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아버지의 삶은 아버지의 것이었고 어머니의 삶은 어머니의 것이었다. 나는 한 번도 어머니에게 왜 이렇게 사느냐고 묻지 않았다. 그것은 아무리 어머니라 해도 예의에 벗어나는 질문이었다. 누군가 내게 그런 실례의 발언을 하는 것도 결코 용납하지 않았다. 나는 그런 사람들과는 두 번 다시 얼굴을 마주하지 않았다. 상처받은 내 자존심이 용서를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 주체를 나로 놓고 보면, 중요도가 확 달라진다. 조용히 입 다물고 구경만 할 수는 없다. 내 인생을 탐구하기 위해서는 나의 남동생의 인생도 가끔씩 들여다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작은 상처는 오래 간직하고 큰 은혜는 얼른 망각해버린다. 상처는 꼭 받아야 할 빚이라고 생각하고 은혜는 꼭 돌려주지 않아도 될 빚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생의 장부책 계산을 그렇게 한다.

사랑의 배신자를 처벌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잊어버리는 것이다. 그것도 아주 완벽하게, 꿈속에서도 생각나지 않도록 완벽하게 잊어주는 것이다.

다만 한 가지, 어머니는 결코 이모가 읽어왔던 그 많은 소설책이나 시집을 선택해 책값을 치르지 않을 것이란 점만은 분명했다. 이 쌍둥이 자매들은 똑같이 책에 의지하는 성향이 강한 편이었지만, 선택하는 책은 이토록이나 정반대였던 것이다. 마치 그들의 삶처럼.

나는 바다를 잊을 수 없어 연신 뒤를 돌아보았다. 세상의 모든 잊을 수 없는 것들은 언제나 뒤에 남겨져 있었다. 그래서 과거를 버릴 수 없는 것인지도.

사랑이란 붉은 신호등이다. 켜지기만 하면 무조건 멈춰야 하는, 위험을 예고하면서 동시에 안전도 예고하는 붉은 신호등이 바로 사랑이다.

나는 나인 것이다. 모든 인간이 똑같이 살 필요도 없지만, 그렇다고 똑같이 살지 않기 위해 억지로 발버둥 칠 필요도 없는 것이다. 이제 나는 더 이상 나를 학대하지 않기로 했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사랑을 시작했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미워하게 된다는, 인간이란 존재의 한없는 모순...

내가 나영규에게 조금이라도 덜 미안한 것은 그가 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그 인생계획표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나영규의 인생에서는 제아무리 중요한 일이라도 인생계획서의 테두리를 벗어나도 좋을 만큼 중요한 것은 없었다. 그것이 사랑이라고 해도 결코 예외일 수 없었다. 그 안에서 사랑하면 될 일이니까. 굳이 표 밖에서 놀아야 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살아봐야 죽을 수도 있는 것이다. 아직 나는 그 모순을 이해할 수 없지만 받아들일 수는 있다. 삶과 죽음은 결국 한통속이다. 속지 말아야 한다.

어머니는 더욱 바빠졌고 나날이 생기를 더해갔다. 아, 어머니의 불행하고도 행복한 삶...

인간에게는 행복만큼 불행도 필수적인 것이다.

삶의 어떤 교훈도 내 속에서 체험된 후가 아니면 절대 마음으로 들을 수 없다. 뜨거운 줄 알면서도 뜨거운 불 앞으로 다가가는 이 모순, 이 모순 때문에 내 삶은 발전할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최초작성일 : 2019. 1.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