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기록

인생에는 특별한 것과 평범한 것이 모두 필요하다ㅣ이나가키 에미코ㅣ프랑스 리옹에서 평소처럼 살아보는 에세이

기로기 2021. 10. 24. 09:25

정말 좋아하는 작가님. 신작이 올해 국내 출간된 걸 모르고 있다가 얼마 전 발견! 반가웠다. 실제로 아는 사람도 아닌데 몇 년 만에 책을 낸 걸 알고 ‘언니 잘 살고 계셨군요!’ 이런 느낌. 이번에는 어떤 통찰력과 따뜻함이 있는 글을 쓰셨을까 궁금한 마음으로 읽었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2018년에 진작 나온 책이었다. 그리고 냅다 외국여행을 떠나 쓴 에세이였다. 이 에세이가 코로나 팬데믹 1년하고도 반년이 지난 후 뒤늦게 번역되어 나온 거다.

일종의 여행 기록인지는 몰랐다. 원제는 직역하면 <인생은 어디로든 문(door)>이다. (도라에몽에 나오는 ‘어디로든 문’에서 따온 것)

찾아보니 국내에 아직 번역 안 된 완전 최근 신간이 있다. 무려 지난달에 나온 따끈따끈한 책. 읽어보고 싶다!


제목은 一人飲みで生きていく (혼술로 살아간다)

이 작가님은 자기 자신을 알고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그것에 만족하고, 그것을 솔직하게 표현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게 글에서 느껴져서 좋아한다. 나는 아직 자신을 알지 못하는 건 둘째치고 인정하지 못해서 발버둥치고 괴로워하는 한낱 중생이기 때문에..! 이 분의 글을 읽으며 많은 위안을 받았다. 마음이 편해지고, 괜찮다고 다독이게 된다. 어떻게 보면 별 것 아닐 수 있는 일도 그 사람의 캐릭터와 솔직함을 통해 재미있는 이야기가 된다. 별 거 아닌 일을 별 걸로 만드는 그런 재주가 있는 작가다. 세상을 대하는 태도 자체가 그런 사람. 그렇기 때문에 별 거 아닌 일상을 특별하게 살아갈 수 있는 사람.

14일이라는 길지 않은 기간이긴 하지만 하필 프랑스라니.. 일본인과 프랑스인은 사회 매너 측면에서 상극일 것 같은데. 이 상냥하고 샤이한 50대 여성이 콧대 높은 프랑스인들에게 얼마나 쌀쌀맞은 대꾸를 들었을까 생각하니 마음이 짠하다. 이방인의 신분으로 낯선 외지에서 소속감을 느껴보려는 시도가 무색해지는 그런 기분이 어떤 건지 어느 정도 알고 있기 때문에.

여전히 세탁기, 냉장고, 텔레비전 안 쓰고 살고 계셨다니.. 이 언니는 찐이다.

무엇보다, 사람이 귀한 걸 아는 사람이다. 메말라가던 내 마음을 촉촉하게 해준 책이다. 역시 믿고 보는 작가 언니다.

그 동안 여행을 가면 마치 미션을 완수하는 마음가짐으로 다녀왔는데, 이제는 마주치는 한 사람 들어가는 한 가게 그 과정을 오롯이 즐기면서 다니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인생도 마찬가지.

다음 행선지인 사케 여행 에피소드는 조금도 안 나와서 아쉬웠다. 이 아쉬운 마음은 작가의 다음 책으로 또 해소하고 싶다.


25) 누군가와 진심으로 소통하려면 우선 내가 누구인지 알아야 한다. 내가 진심으로 알고 싶은 것, 진심으로 흥미를 느낄 수 있는 것이 없다면, 말이 통한들 무슨 소통을 할 것이며, 애초에 소통이 필요하지도 않을 것이다.

28) 다른 사람이 원하는 것과 내가 원하는 건 달라. 제아무리 멋지고 재미있어 보여도, 그건 그 사람의 즐거움이지 나의 즐거움은 아니니까.

94) 경치란 참 위대하다. 탁 트인 경치 앞에선, 누구나 마음이 넉넉해진다. 게다가 공짜다.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다는 뜻이다. 앞으로 이곳에서 즐거운 경험을 전혀 못 하게 된다 해도, 이 경치를 보러 올라오면 ‘그래도 리옹에 오길 잘했어’ 하고 나를 위로할 수 있을 것이다.

133)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 결국 그것 말고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또 뭐가 있겠나. 내일은 내일의 바람이 불 뿐이다.

180)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이어짐이란 어째서 이렇게 덧없고 미약하기만 할까. 이어져 있다 싶다가도, 사소한 계기로 쉽사리 끊기고 만다. 그러니 매일, 사람들과의 인연이 끊기지 않도록 노력해야만 한다.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고, 다른 사람을 도와주는 일. 그렇구나.

192) “프랑스엔 모르는 사람에게도 웃으며 싹싹하게 구는 문화가 없을 뿐. 오히려 이유도 없이 실실 웃으면 바보 같다고 생각하는 구석이 있어. 문화가 다를 뿐이지, 딱히 상냥하게 굴지 않더라도 일본인을 싫어한다거나 그런 건 아니니까 일일이 속상해하지마”라는, 프랑스에서 고생께나 해본 사람다운 언니의 드라이한 조언.

196) 노인들이란 전 세계 공통적으로 고독하고, 아마도 그래서 더욱 다정한 건지도 모르겠어요. 그리고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덕분인지, 마음에 여유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야말로 나라의 보배죠.

204) 사회가 점점 ‘발달’함에 따라 사람들이 개별적인 대화를 피해 대형 제조회사에서 만든 패키지 상품을 마트에서 묵묵히 대량 구매하게 되면서, 지금은 쌀가게, 생선가게처럼 얼굴 보며 물건을 파는 소매점은 숨이 끊어지기 직전이다. (심지어 온라인 주문-새벽배송이 보편화된 요즘은 오프라인 마트 조차도 잘 안 다닌다. 가끔 가더라도 정말 꼭 필요한 형식적인 말들만 오갈 뿐이다.)

207) 내가 내 생활에서 무엇을 원하는지만 알고 있다면, 세계는 내 이웃으로 바뀐다. 그렇다면 여행이란, 이웃을 넓히는 일이 되는 셈인가? (여행을 이렇게 정의하는 건 처음 봐서, 멋진 발상이라 생각했다.)

226) 나쓰메 소세키는 런던 유학 시절 우울증에 걸렸다던데, 만약 소세키가 스스로 음식을 만들어 먹었더라면 우울증에 걸리는 일은 없지 않았을까요. 자취는 위대하다니까요!

241) 기쁨의 허들이 이렇게 낮은 것도 꽤 괜찮은 일이다.

244) 내일 출발할 때 니콜라(에어비앤비 호스트)에게 남길 메시지(고마웠어요, 정말 신세 많이 졌어요, 책상 위에 선물을 두고 갑니다.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습니다)를 영어로 쓰고, 교수님에게 드릴 꽃에 끼울 카드(친절하게 대해주셔서 정말 고마워요)도 인터넷 사전을 뒤져가며 열심히 프랑스어로 썼다. (니콜라에게는 와인과 직접 바느질한 숄, 아랫집 사는 교수님에게는 시장에서 산 꽃과 함께 카드를 쓴거다. 받는 사람 입장에서 정말 감동일 거 같다. 나도 예전에 한번 중고나라 거래하면서 선물처럼 정성스레 포장하고 메모를 남겨 택배 보낸 적 있었는데 그걸 받은 분에게 기분이 너무 좋았다는 감사 메시지가 왔던 적이 생각났다. 작은 친절이 상대방에게 기쁨을 준다.)


책에 소개된 저자의 하루 일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