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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기록

넷플릭스가 삼켜버린 기독교ㅣ홍광수ㅣ기독교인의 관점에서 본 반기독교적 대중문화

by 기로기 2025. 11. 10.

친구의 소개로 읽게 된 책이다. 교회의 자성적인 목소리를 담은 책이라고 듣고 읽었다.

생각보다 훨씬 더 종교적인 색채가 강한 책이었다. 기독교인들 읽으라고 쓴 책인 것 같은?

 

나는 종교가 없는데 종교에 관심은 많다.
예전에 한창 독실한 기독교인 친구랑 영화 볼 때 너무 기독교 비판적인 장면이 나오면 친구가 불편하지 않을까 신경쓰여서 같이 보러 갈 영화 고를 때도 그런 장면 없는지 미리 체크하고 그러던 때가 있었다.
목사 입장에서 미디어의 반기독교적인 면면을 이렇게 보는 구나 알 수 있어서 흥미로웠다. '불신자'라는 표현도.

나랑 완전 다른 세계관을 가진 사람의 관점이라 오히려 너무 참신했음.
이 책에서 얘기하고 우려하는 기독교 비판적인 사람이 바로 자신이라면 이 책을 한 번 읽어보길. 

11) 이 정도면 이미 스마트폰이 주인이고, 그 스마트폰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인간이 노예처럼 일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인간들은 스마트폰에게 전기를 제물로 바치기 위해 힘들게 노동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만일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영화 <매트릭스>(The Matrix) 속의 빨간 알약이 필요하다. 스마트폰은 이미 이 시대를 지배하고 있는 유사-신이며, 거짓-신이다. 인간은 스마트폰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와 영화, 드라마를 보면서 반성적 사유 능력을 잃어버린 채 스스로 노예인지도 모르는 노예 상태에 들어서 있다.
나는 기독교가 현대 문화의 절대적 영향력 아래 빠져들게 된 원인이 사유 능력의 상실에 있다고 생각한다. 많은 크리스천들이 자기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신자유주의의 질서 아래에서 소비자로서만 존재하고 있다.

설교는 관습적으로 규정되어 있는 이미지에 대해 새로운 이미지를 제공함으로써 인식과 경험, 신앙과 삶에 대한 태도가 다른 방식으로 재조직되도록 관여하는 행위이다. 이런 측면에서 오늘날 가장 영향력이 막강한 설교 행위를 꼽는다면, 단연코 그것은 '영화'라는 형식을 가지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미디어 이론가이자 문화비평가인 마셜 매클루언의 말처럼 "The Medium is the Massage"(미디어는 마사지다)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끊임없이 신체와 정신을 마사지하고 침입해오는 특성을 가진 메시지이다.

스스로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고 자부하는 무신론자들도 자신이 얼마나 신화적인 세계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는지 자각하지 못한다.
작품에 대한 팬덤(fandom)이든 어떤 가수에 대한 팬덤이든 팬덤은 대상에 대한 '추앙'을 포함한다는 점에서 종교와 유사하다.
그들은 자신의 팬덤을 위해 스스로 지갑을 열어 소비라는 이름의 열렬한 현금을 아끼지 않는다. 대중매체는 세속신앙을 먹고 성장하는 거대한 종교나 다름없다. 다만, 이 종교는 '신'을 신이라고 부르지 않을 뿐이다.

53)디지털로 구현된 지옥의 이야기나 천국의 이야기는 사실 먼 미래에 일어날 일이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의 생각보다 더 빠르게 선택의 순간이 다가오게 될 것이다. 우리가 어린 시절 불렀던 교회학교 찬양 중 "돈으로도 못 가요 하나님 나라, 믿음으로 가는 나라 하나님 나라"라는 가사가 있었다. 하지만 디지털 천국은 더 이상 믿음으로 가는 나라가 아니다. 그 곳은 돈으로 충분히 갈 수 있는 나라다.

지금까지는 인간이 인간을 영원히 벌할 수 없었다. 인간이 인간에게 내릴 수 있는 최대 형벌은 사형이라는 판결을 통해 이 땅에서의 생명을 소멸시키는 것이었다. 그 어떤 죄에 대해서도 영원한 형벌을 부과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디지털 감옥으로 구현된 지옥에서는 영원한 형벌이 가능하다. 자신의 신체에서 복사된-존재는 스스로를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한다는 점에서 전통적인 형이상학에서 말하는 '영혼'과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이 복사된-존재를 디지털로 구현된 특정한 공간에 삽입한 후, 단테(Dante)의 「신곡』에 등장하는 지옥을 구현했다고 가정해 보자.
그리고 '복사된-존재로서의-자기 자신'이 디지털 감옥에서 영원히 고통을 받게 된다면, 이것은 우리가 전통적으로 생각하는 지옥과 크게 다르지 않다. 차이가 있다면 신체성이 거세되어 있다는 점 정도일 것이다.
인간은 영원한 지옥을 구현할 테크놀로지를 이제 곧 손에 넣게 될 것이고, 사법적인 시스템은 '무기징역'의 의미를 재고하게 될지도 모른다. 인간은 곧 영원한 징벌의 수단을 가지게 될 것이다.
만일 인간이 누군가를 영원히 징벌할 수단을 갖게 된다면, 그것은 정의의 시작일까 혹은 또 다른 폭력의 시작일까?

그렇다면 디지털 천국에서의 삶은 행복하기만 할까? 자신이 원하는 시대에서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영원히 즐길 수 있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을 천국이라고 부를 것이다. 하지만 욕망의 충족과 일정한 자극이 행복의 조건이 된다면 문제가 발생하는데, 어떤 욕망이나 자극도 결국에는 점점 무뎌진다는 데 원인이 있다. 처음에는 자신이 원하는 시대에서 원하는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 즐거울 수 있지만, 그 시간이 영원히 늘어난다면 과연 그 시간은 권태로움에 가깝게 될까 혹은 지속적으로 행복한 상태에 머물게 될 것인가?

현재 기독교에게 필요한 태도는 "기독교는 정말 괜찮은 종교야"라고 말하는 변증이 아니다. 세상은 더 이상 기독교의 말에 주목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메시지와 일치하는 크리스천들의 삶이다. 물론 여기서 의미하는 괜찮은 삶이란, 세속적 욕망을 전시하는 삶을 의미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다른 사람들처럼 근사한 오마카세 음식점에서의 저녁 식사, 야경이 아름다운 호텔에서의 호캉스, 이국적인 여행지, 멋진 패션과 트렌디한 장소 등 예수님을 믿지 않아도 누구나 업로드 가능한 사진과 콘텐츠로 자신의 인스타를 채우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아마 소비주의의 세상 밖으로 뛰쳐나가 자신의 불편함을 감수하면서까지 세상을 감동시키는 삶일 것이다.

대중들이 바라보는 크리스천의 이미지는 오로지 전도 외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다. 기독교를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영화나 드라마 작품이 나올 때마다 교회에서는 "이런 작품은 전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전형적인 반응을 보여왔기 때문이다.
작품에서 부정적으로 묘사되는 맥락이나 그것이 지적하는 내용에 대해 반성적인 태도를 갖기보다는 무조건 억울하다는 식의 반응만 되풀이 되어 왔다.
이런 태도는 일반 대중들이 기독교를 다른 종교와 대화하려고 하지 않는 독단적인 공격성을 지니고 있으며, 사회적인 대화가 거의 불가능한 폐쇄적인 종교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로 간주하게끔 만들었다.

살아남을 수만 있다면 악마와도 손을 잡겠다는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늘어날 수밖에 없는 환경이다.
하지만 신이 나에게 무관심하다면 악마와라도 손을 잡겠다는 식의 생각은 언제나 내 편과 저편을 날카롭게 나누는 이분법적인 사고방식을 기반으로 작동한다. 내 편에 속한 사람들은 어떤 잘못을 해도 서로 비판하지 않고 편을 들어주고, 저편에 속한 사람들에게는 무자비한 배제의 논리를 적용한다. 내 편을 들어준다면 누구라도 상관없고, 성공과 승리를 위해서라면 악마와라도 손을 잡겠다는 사람은 결코 기독교적인 윤리를 지닌 사람은 아니다.

232) 현실을 초극할 수 있는 능력 이 결여된 사람들이 종교를 자기 위로와 위안으로 삼아 고달픈 하루를 살아간다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신뢰하는 사람이라면 더 이상 신은 필요하지 않으며, 만들어진 신을 벗어나 무소의 뿔처럼 홀로 초인의 삶을 살면 된다는 세속종교의 교리를 전파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종류의 주장은 세계에 존재하는 악의 문제와 연관된 크리스천들의 깊은 고뇌와 한탄, 분노에 대해 알지 못하거나 혹은 알더라도 무관심한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세계에는 악이 존재하고 현실은 정의롭지 않다. 이런 세계에서 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과 거절하는 것 중 쉬운 선택은 신의 존재 를부정하는 것이다. 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사람은 현실에 존재하는 온갖 부정의에 대한 이유를 끌어안고 고뇌해야 한다. 신이 침묵하고 계시는 것 같은 상황에서도 신에 대한 신뢰를 잃지 않고 현실 너머를 바라보아야 한다. 이러한 삶의 태도는 결코 정신력이 나약한 사람이 가질 수 있는 태도가 아니다. 정신이 나약한 사람은 굳이 신의 존재를 인정하면서 이해되지 않은 현실을 넘어서고자 노력할 필요가 없다. 그저 손을 툴툴 털면서 "신은 죽었다"라고 말하면 아주 손쉬운 해결 방법에 도달할 수 있다. 크리스천들은 비반성적인 사유를 하는 맹목적인 존재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