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기록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ㅣ김기태ㅣ우리들의 다양한 이야기

기로기 2025. 5. 2. 17:42

예전부터 서점에서 계속 눈에 잘 보였던 소설집이다.

작년 젊은작가상 수상집에서 <보편 교양>을 재밌게 읽고 나서 이 작가의 소설집도 읽어봐야지, 봐야지 하고 있었는데 친구도 얘기를 했고 4월부터 구독 시작한 문학잡지 릿터에 인터뷰도 실렸길래 이번에 읽게 되었다.

문학계를 보면 젊은 여성 작가들의 활약이 두드러지는데, 성적 지향을 주요 소재로 삼지 않는 젊은 남성 작가가 많지 않아서 더 눈길이 가는 작가인 것 같다. 리뷰를 읽다 보니 나만 그렇게 느낀 게 아니었다.

명확하게 무언가 사상을 강하게 주장하고자 하는 소설이 아니다. 그래서 글이 밋밋하다, 무난하다는 느낌을 받는 독자들도 있는 것 같다. 

유해한 남성상이 등장하지 않고, 여성을 성적대상화 하지 않으면서, 여성도 공감할 수 있는 이 시대를 담아내고 있다. 

동시에 여성 작가와는 미묘하게 다르다는 것도 글에서 느껴졌다. 

 

소설을 싣는 순서도 편집자나 작가가 다 치밀하게 고려를 한 것일 수도 있지만, 요즘 소설집을 읽을 때 순서대로 읽지 않고 끌리는 제목부터 왔다갔다하며 자유분방하게 읽는다. 이 책도 중간에 실린 표제작부터 읽었다. 

스타일이 고정되어 있지 않고 폭넓은 것 같아서 앞으로도 기대되는 작가다. 인터뷰를 보니 작가가 굉장히 현실적인 생각을 하는 분인 거 같았다. 

 

나에게는 모든 단편이 다 좋았다기보다는 이야기마다 편차가 있었다. 

리뷰는 실린 순서대로 짧게 해보자면,

 

세상 모든 바다

작가가 대중가요나 아이돌 문화에 관심이 많다는 게 여러 작품에서 느껴지는데 이 작품도 그랬다.

정말 있을 법한 일이다.

 

롤링 선더 러브

참 귀여웠던 소설. 너무나 [나는 솔로]가 떠오르는 설정이었음. 소설이 끝난 후에 작가도 밝히고 있다.

싱글 여성이라면 공감할 요소가 많다.

남성작가가 여성 화자로 이 정도 쓰려면 관찰을 상당히 했어야 가능할 거라 생각한다.

나는 사랑이 뭔지도 모르면서 하고 싶다고 말하네. 웃겨. 아주 웃겨. 리아는 사랑이란 우리가 관성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크고 넓고 깊다며, 눈을 뜬 자에게는 도처에 존재하는 것이라 했다. 왜 사랑을 성애에서만 구하려고 하니. 우리는 신을 사랑할 수도, 계절을 사랑할 수도 있지. 조카의 해맑은 웃음에서, 동네 빵집에 진열된 갓 구운 빵에서, 뜻밖에 가뿐하게 눈뜬 아침 이불 속에서 듣는 새들의 지저귐에서 사랑을 발견할 수 있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야. 그게 성숙이라고. 리아가 와인을 콸콸 마시며 지론을 펼칠 때 맹희는 "그거 삼만오천원짜리다"라고 타박하면서도 친구의 존재에 소중함을 느꼈고, 그 소중함 역시 사랑의 일종이라는 데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사랑에 대한 책을 읽었을 때 사랑이 얼마나 넓고 다양할 수 있는지 새삼 느꼈는데 여기서 같은 얘길 해서 반가웠다.)

 

사랑은 걷잡을 수 없는 정열일까, 견고한 파트너십일까. 둘 다일 수도, 둘 다 아닐 수도. 왜 사람은 정체를 알 수 없는 것에 대해서도 부재를 느낄 수 있는지. 걔였는지 쟤였는지 이름과 얼굴은 지워졌어도 촉감과 온도와 음향, 아득한 형체로 남은 것들. 지나간 애인들은 대체로 얼간이거나 양아치였고 그 때는 괜찮은 놈이라 믿었는데 돌아보면 영 아니었다. 한두 명 쯤은 제법 괜찮은 놈이었는데 그때는 몰랐다. 함께 사랑을 밝혀낼 수도 있었을까. 

 

전철역을 나서고도 집에 가지 않고 산책하는 날들. 노점에서 굽는 붕어빵 냄새. 담장 위를 걷는 고양이의 발걸음. 전동 킥보드에 올라탄 여중생들의 웃음소리. 모든 것이 은총처럼 빛나는 저녁이 많아졌다. 하지만 맹희는 그 무해하게 아름다운 세상 앞에서 때때는 무례하게 다정해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런 마음이 어떤 날에는 짐 같았고 어떤 날에는 힘 같았다. 버리고 싶었지만 빼앗기기는 싫었다. 맹희는 앞으로도 맹신과 망신 사이에서 여러 번 길을 잃을 것임을 예감했다. 많은 노래에 기대며. 많은 노래에 속으며.

 

전조등

분명 내용은 이름 모를 남성 주인공이 사랑하는 여자를 만나서 아이 낳고 오손도손 행복하게 잘 산다는 건데,

읽고 나면 기분이 매우 찝찝하고 불길하고 안 좋다. 나만 그런 게 느낀 게 아니었는지 이 소설에 대한 리뷰가 거의 그랬다.

정상성, 삶을 연기하는 인간 등 여러 이야기가 있었지만 어쨌거나 나는 그 털신이 너무 마음에 걸린다.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같은 학교에 다녔던 둘이 나중에 재회해서 연애를 하는 게 주요 흐름인데 연애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기 보다는,

가진 게 많지 않고 미래도 또렷하지 않은 요즘 청년들의 모습을 잘 보여준 것 같다.

이 작품을 보면 인터넷 커뮤니티나 밈에도 작가가 얼마나 밝은지 알 수 있다.

미래는 여전히 닫힌 봉투 안에 있었고 몇몇 퇴근길에는 사는 게 형벌 같았다. 미미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주워 담았고 그게 도움이 안 될 때는 불확실하지만 원대한 행복을 상상했다. 

 

보편 교양

작년 문학동네 젊은작가상 수상작이라 기존에 읽었던 작품.

 

로나, 우리의 별

로나는 서바이벌 프로그램을 통해 데뷔한 가수이고 그녀의 연예인 인생은 몇몇 실제 연예인이 떠오르는 설정이었다.

그녀의 이야기보다 그녀의 음악을 통해 알게 모르게 이어져 있는 사람들에게 마음이 갔다.

 

태엽은 12와 1/2바퀴

이 작품도 분위기가 어딘가 무섭고 <전조등>처럼 찝찝하고 으스스했다.

검은 봉지에 든 게 무엇이었을까 알고 싶지 않지만 궁금하기도 해서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나 찾아보니

'후회'라는 키워드가 많이 보였는데 납득이 간다.

그리고 화자가 그 남자와 동일인물이 아니겠냐는 추측이나, 딸이 과연 돌아오겠느냐는 추측 등이 쎄한 여운을 남기는 작품이다.

스릴러 쪽도 잘 쓰시는구나.

 

무겁고 높은

작품의 분위기가 평온한 듯 하면서 무료한 듯 하면서 슬픈 듯 쓸쓸한 듯 담담한 듯 매력적이었다.

무언가를 한다고 해서 누구나 그 무엇의 최고가 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자기 인생을 계속 살아나간다.

 

팍스 아토미카

이 작품이나 <보편 교양>을 보면 작가가 역사 등 문학 외의 독서도 많이 하지 않을까 싶었다.

어떤 분이 리뷰에서 이 작품의 예민함이 자기에게까지 전이되는 듯해서 끝까지 겨우 읽어냈다고 했는데 작품을 읽자마자 납득이 가서 아, 했다.

약간의 강박은 누구나 있고 때론 도움도 되겠지만 이 정도면 정말 스스로도 얼마나 인생이 고달플까.

성당에서 나오는 길에 어머니에게 넷플릭스가 안 된다는 메시지가 왔다. 나는 침착하게 '안 됨'의 의미부터 파악했다. 몇 장의 캡처 사진이 필요했지만 화를 내지 않고 '됨' 상태로 바꾸는 데에 성공했다. 하지만 세 달 뒤, 어머니를 처음으로 비행기에 태워 나가사키 인근의 온천 휴양지에 모셨을 때 나는 화를 내게 된다. 어머니가 첫날부터 이렇게 얘기했기 때문이다. "볼 것도 없네!" (너무 리얼해서 빵 터졌던 구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