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기록

욱해서 쓴 편지ㅣ박소예ㅣ건전한 스트레스 해소법

기로기 2023. 1. 22. 20:13

컨셉을 잘 잡았다. 편지 형식이 아니었으면 이런 저런 이야기를 묶은 통일성 없는 에세이였을지도 모르는데 상대에게 편지를 쓰는 방식으로 엣지가 확 생김

영화과 나오고 영화감독 지망하면서 영화 스태프 (영화사 직원)하다가 문화센터 직원 하다가(이건 아마 알바?) 개인 책방 차리셨나 보다. 비건빵도 파신다는데 책 후반부에 감동적인 이유가 나온다.

책방을 2층에 냈다가 1층까지 확장했다고 나오는데, 운영하시는 책방을 찾아보니 지금은 3층으로 옮기신 거 같음. 책을 읽어보면 그럴 만도 함. 더 쾌적해지셔길 바람.. 부디.

아래는 읽으면서 들었던 생각들 :

진짜 영화감독 만큼 기약 없고 + 타인‘들’의 선택 없이는 불가능한 직업도 드물다.. 세상 많은 일이 그렇지만 이 직업은 특히나 내 의지만으로 노력만으로 성사되지 않음.

2층에서 하는 장사와 1층에서 하는 장사가 이렇게 다르구나…! 깊게 생각해본 적이 없던 주제인데 아찔할 정도다.

책 한 권을 팔면 2천 얼마가 남고, 커피 한 잔을 팔면 2천 얼마가 남는 책방 장사의 월세가 2백만원인 세상.

문화센터 진상 에피소드도 그렇고, 막말 복지사도 그렇고, 빈티지 그릇 깨놓고 변상할게요가 끝인 손님에, 웃어주니 (이성으로서) 관심 있는 줄 아는 남자 손님에, 예체능 전공 비하 코스트코 카드 빌런에.. 공짜로 공간 대여 해달라질 않나.. 안 겪어도 될 모욕을 너무 겪으셨네.. 보면서도 욕 나오는데 정말 자영업자 극한직업 맞구나. 존경스럽다. 안쓰럽기도 하고.

그런 인간들을 만나고 나서 이렇게 자기 감정을 글로 풀어내고 승화시킨다는 게 참 좋은 것 같다. 목소리를 높이고 따지고 하면서 직접적인 갈등을 빚을 일 없이 나 혼자 건전하게 감정을 정리하는 거니까. 그러면서 더 단단해지고 성장하고 살아갈 힘을 얻고. 건전한 스트레스 해소법!!! 인간은 안 바뀐다. 그런 인간은 계속 그렇게 살 거다. 그러니 안 엮이는 게 상책이다..

 

이 사람은 어떤 환경에서 살아온 걸까 싶은 반듯한 손님을 만날 때도 있다고. 난 그런 반듯한 손님이 되기 위해 더 노력해야겠다. 타인을 존중하고 헤아리고 배려하고. 

 

 

책 속의 인상적인 문장들 :

저희 할머니는 "아껴야 잘 산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가끔은 "아끼면 똥 된다. 쓸 땐 써야 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할머니께 여쭤봤습니다. 할머니에겐 '쓸 때'가 도대체 언제냐고요. 그러자 할머니는 "사람 된 도리를 하는 일에는 아끼지 말아야 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축의금, 부조금, 소중한 사람을 위해 내는 밥값 등) 축하하는 일, 위로하는 일, 격려하는 일, 감사하는 일에는 돈을 아끼지 말라는 뜻이었습니다.

 

나는 너를 만나는 게 아니라 만나준다고 생각했고, 네가 받은 수술이란 다 무겁고 심각한 일 때문이라고만 여겨온 거야. 평범하게 살아왔을 네 인생을 내 삶보다 불행한 것으로 치부하고 내 멋대로 동정한 거지. 나의 편협함과 이기심에 또 한 번 얼굴이 화끈거렸어. 진심으로 사과할게. 정말 미안해, J야. 나는 너를 나보다 더 낮은 존재로 만들고 나는 너보다 낫다며, 불쌍한 아이를 도왔으니 나는 참 괜찮은 사람인 것 같다며 스스로를 높이고 있었어. 열 살일 때도, 10년이 지나 성인이 되어서도.

 

모두가 각자의 삶대로 살아갈 수 있는, 다양한 문화와 다양한 생각이 존중받을 수 있는 사회가 되기를 꿈꿉니다. 기왕 하는 일이라면 즐겁기를 원하고, 의미 있는 일이기를 원하고, 지속성 있기를 원하고, 돈을 잘 벌기를 원합니다.

 

복지사님이 대꾸하셨죠. "그러니까 공부를 열심히 해서 제대로 된 대학을 다니든가, 동생이랑 할머니를 위해서 빨리 돈이나 벌었어야지. 나랏돈 받기가 그렇게 쉬운 줄 알아? 너 같이 형편 어려운 애들이 얼마나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잘하는데, 너도 노력이라도 해야지." (이게 실화라는 게 안 믿길 정도로, 드라마 주인공에게 시련을 주기 위한 지나가는 빌런의 대사 같을 정도로 충격적임)

 

어쩌면 저는 예술가가 되기를 꿈꾸며 신분 상승을 기대했는지도 모릅니다. 예술에도 급이 있다면, 성적으로도 실패했고 재산으로도 실패한 나에겐 예술가가 되는 것만이 유일한 계급 상승의 기회겠다고 말이지요(그 생각 역시 오해였고, 그 오해는 영화과 생활을 하며 아주 빠르게 깨져버렸습니다). 하지만 결국 제가 벗어나야 하는 것은 딜레타트가 아닌 딜레탕트라 비웃는 일부 사람들, 누군가를 자신보다 열등한 존재로 취급하는 이들의 위선적인 시선이었습니다. 사회의 어떤 그룹이나 계층에 속하려고 애쓰기보다 나만의 자리를 만드는 것이 저에게 더 어울리는 삶이었음을 차츰 깨달았습니다. 

 

만 원짜리 책을 팔면 남는 이천 얼마의 돈과, 사천 원짜리 커피를 팔면 남는 이천 얼마의 돈으로 서울의 시세를 감당하기가 이토록 힘들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달으며, 낭만에 속지 말자는 다짐을 오늘도 뼈에 새깁니다.

 

대형서점에서 훼손되는 책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대형서점은 작은 책방과 다르게 책에 하자가 생겨도 출판사로 반품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위탁거래가 아닌 매절거래로 책을 입고하는 작은 책방은 책이 훼손되어도 출판사로 반품할 수 없어 책방 주인이 손해 비용을 부담해야 합니다.

 

1인 점포는 그런 환경이 아니었습니다. 하루 종일 혼자서 작은 평수의 상점을 운영해야 하고, CCTV는 설치되어 있지만 비상벨 같은 건 없었습니다. 더구나 골목에 위치한 저희 서점은 건물 1층도 아닌 2층에서 유일하게 운영 중인 상점이라 큰일이 벌어져도 도움을 요청할 수 없었습니다. 나중에 이 일화를 주변 상점의 여자 사장님들과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사장님들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때 깨달았습니다. 여성 혼자 상점을 운영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일인지를요.

 

1층이면 출입문이 건물 바깥과 연결되어 있어 좀 더 안전할 것 같았지만 막상 열어보니 그렇지도 않았습니다. 1층은 2층보다 더 안과 밖의 경계가 없는 곳이었습니다. 화장실을 찾는 사람, 잡상인, 길을 묻는 사람, 시주를 받으러 다니는 스님, 전도하러 온 교인, 사이비 전도단, 밤이 되면 거리를 헤매는 취객들까지 온갖 종류의 사람들이 낮부터 밤까지 너무나 편안하게 서점 문을 열었습니다(물론 진짜 손님들도 많아졌지만요).

 

나는 서서히 너와 더 이상 나눌 대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어. 이슈에 따라 반응하는 너의 태도도 너무 달랐지. 너는 어린이집과 관련된 사건들은 하루에도 몇 번이고 청원해달라고 링크를 공유하면서 다른 친구가 문제 삼는 환경, 젠더 이슈에는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더라. 우린 점점 다른 곳을 향해 걷고 있는 것 같아.

 

저는 책뿐만 아니라 무엇을 소비하든 자신만의 취향을 만들어나가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유명한 책, 많이 팔리는 책이 꼭 나에게 '인생책'이 되란 법은 없거든요. 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꾸준히 탐색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취향을 만들어가야 합니다.

 

저는 겪어보지 않은 삶에 거리를 두려고 노력합니다. 타인의 현실을 저의 섣부른 환상이나 정의로 재단하고 싶지 않아서요. 타인의 삶은 결코 그 이면을 알 수 없으니까요. 단지 책을 읽고 기회가 생길 때마다 이야기를 들으면서 조금씩 이해해보려고 애쓸 뿐입니다. 선생님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제가 주제넘게 가르치려 드는 것은 아니지만요. 그래도 이 말만은 꼭 전하고 싶습니다. 선생님, 다른 책방에 가서는 그러지 마십시오. 가장 비싼 책을 사신다고 하더라도 '내가 돈을 쓰니까 너희가 좀 살만하지?'라는 태도는 하나도 안 고마워요. 가장 싼 책 한 권을 사가도 선물 열 개를 챙겨주고 싶은 손님도 있습니다. 그 손님이 선생님은 아니었네요.

 

'내가 힘든 일을 겪을 때 네가 이렇게 찾아와준 것을 보면 너는 벌써 나를 용서했구나, 먼저 이해해줘서 고맙다'라는 문장이 쓰여 있었어요. 저는 언니를 이해하지도 용서하지도 않았어요. 그냥 그때 일을 가슴에 묻은 것 뿐이에요. 그런데 언니의 이 메시지 하나가 다시 저의 옹졸한 마음속으로 불쑥 들어와 심장을 쑤셔대더라고요.